01. 지인과 대화를 하다가 꽤 원초적인 질문 하나를 건네받았습니다.
'왜 글을 쓰시나요?'라는 질문이었죠. 저는 글 쓰는 걸 좋아하는 편에 속하고 다른 사람이 쓴 글에도 관심이 많지만 이런 특성들만으로 '왜 쓰는가'에 대한 답을 내리기는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저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늘 제 자신에게 묻곤 하죠. '이 글은 또 왜 썼을까?', '저 글은 얼마나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이 한가득이길래 아직까지도 손에서 못 놓고 있을까?'라고 말입니다.
02. 우선 다른 이야기로 잠깐 방향을 틀었다가(?) 돌아오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글에 대해 가장 큰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실제로 뵈니 글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말에서도 느껴져요'라는 반응입니다. 남들이 생각하기에는 그게 왜 칭찬이냐고 되물으실 수도 있겠지만 제가 글을 쓸 때 가장 크게 염두에 두는 부분이 '마치 대화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할 것', '누가 읽는다고 해도 쉽게 읽힐 것', '몰아세우거나 다그치지는 않되 전달하는 바는 분명할 것', 이 세가지 거든요. 그러니 제가 하는 말에서 제가 쓴 글의 톤 앤 매너가 느껴진다면 이 세 가지가 통한 것은 아닐까 하는 기대 섞인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죠.
03. '그럼 말로 하면 되지 왜 굳이 글을 써요?'라는 물음이 자연스레 따라붙겠죠?
'왜 쓰는가'로 물을 땐 희미하던 질문이 '왜 말 대신 글인가?'라고 바뀌면 꽤나 선명하게 방향을 전달해 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내려쓰고 나면 비로소 제 생각이 온전하게 보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기획자의 독서⟫란 책에서도 한 번 언급한 내용이지만, 생각이 말이 되면 그 무게감이 다르듯 말이 글이 되면 그 중량 역시 확연히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내가 하는 말이 활자로 기록되거나 입력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면 어느 순간 그 말들이 점성(粘性)을 가지기 시작하는 느낌이거든요. 서로가 밀도 있게 잘 붙어있으려고 하는 거죠. 그래서 저는 그저 '쓴다'는 표현보다 '내려쓴다'는 말을 좋아하고, 'write' 자체보다 'write down'하는 행위를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04. 예전에 회의를 하던 중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다들 노트북을 쳐다보고 있으니 회의를 주관하는 호스트 분께서 '잠시 노트북 좀 닫아 놓고 우리 회의에 더 집중하자'고 하시더군요. 그랬더니 한 분께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귀로만 들으면 집중이 안 돼서 그러는데 쓰면서 들으면 안 될까요? 남의 말이라도 받아 적다 보면 천천히 이해가 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회의 참여에 관한 애티튜드 문제는 논외로 하고) 저는 이 말에도 시사하는 바가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자기 나름대로 집중하는 방법을 찾았고, 그 방법은 타인의 말을 내려쓰는 행위였을 테니 말이죠.
05. 남이 하는 말도 글로 내려 적으면 비교적 뚜렷해지는 법인데 하물며 내가 한 말은 더이상 강조해 무엇할까요. 어쩌면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내 자신과 대화하며 필요한 이야기를 정리해 엮어가는 과정은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글을 자주 쓰다 보면 말을 할 때도 좀 더 신중해지고, 반대로 열심히 이야기하는 순간엔 '아 이건 글로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그리고 저는 이걸 '내려쓰기의 선순환'이라고 정의하고 있죠.
06. 더불어 글로 쓰여진 내 말들을 리뷰하다 보면 커뮤니케이션의 구조가 훨씬 잘 보입니다. 내가 어떤 용어를 반복해서 쓰고 있는지,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을 시작하고 어떻게 끝맺는지, 어떤 부분에서 주로 빈틈이 발생하는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 역시 발표나 PT를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우선은 시각적인 자료를 모두 배제하고 스크립트 만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스토리를 작성해 봅니다. 그러고 나면 이제 어디에서 비주얼 요소를 삽입하고 또 어디에서 효과를 줘야 하는지 훨씬 명확해지는 거죠.
07. 그러니 여러분도 이 '내려쓰기'를 습관화해보면 어떨까 싶어요. 그저 글을 쓴다, 활자를 입력한다는 식의 관점 대신에 내가 쓴 글을 읽고 또 곱씹어 보며 더 좋은 커뮤니케이션을 만든다는 의미로 접근해 보는 시도 말입니다.
하다못해 내가 쓴 카톡만 쭈욱 되짚어봐도 '이런 얘기는 왜 했을까?', '이제 와서 보니 이 말 되게 네가지(?) 없이 들렸겠네'라는 반성이 되는데 중요한 커뮤니케이션에 필요한 글들은 훨씬 리뷰할 게 많지 않을까요? 우리가 내려쓰기를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도, 내려쓴 것을 열심히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도 이만하면 분명해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