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의 생활명상 즐기기] 이왕이면 긍정적 해석을 하는 게 좋은 이유
Skyedaily
아버지와 딸이 길을 건너다 전방주시를 소홀히 한 차에 치일 뻔했다. 가까스로 사고를 피한 아버지는 “오늘은 정말 운이 좋은 날이구나. 운전자가 뒤늦게라도 우리를 봤기에 망정이지”라고 말했다.
아직도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딸은 “아빠, 나 죽을 거 같아요. 어떻게 차가 맹수처럼 사람을 쫒아다닐 수 있죠?” 하면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같은 일을 경험한 두 사람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신이 겪은 사건을 무의식 중에 ‘이야기’로 만들고 있다. 그런데 ‘이야기’의 요점이 전혀 상반된다. 아버지는 ‘운이 좋은 사건’으로 이야기의 틀을 만들고, 딸은 ‘맹수에 쫒기는 사건’을 말한다.
<내면소통>의 저자 김주환은 ‘사람마다 특정한 이야기 스타일이 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 그가 겪은 사건은 모두 ‘자신이 만든 주관적인 이야기’로 기억 창고에 저장된다. 자신의 경험을 ‘두루두루 입체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간단한 ‘이야기 보따리’를 만드는 것이다.
위의 부녀가 겪은 사건만 봐도 그렇다. ‘운전자의 상태, 신호등 조건, 주변 차량, 도로 노면 상태, 부녀의 시선, 주변 소음….’ 헤아리기 어려운 요인들이 복합적이고 동시에 작동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는 간결하다. 그들은 그 사건을 ‘이야기’로 만들어 저장한 참이다.
두 사람의 표정도 다를 것이다.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몸이 딱딱하고 표정은 경직되어 있다. 지금도 그 일을 겪고 있는 사람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긍정적으로 이야기 하는 사람의 표정은 편안하다. 이야기하는 동안 미소가 어리기도 하고, 흰 이를 살짝 드러내기도 한다. 같은 일을 경험했는데 한 사람은 불행하고 다른 사람은 평화롭다.
이유가 있다. 당신의 모든 기억은 스스로 만든 스토리텔링이기 때문이다. 삶은 ‘자신이 만든 이야기’가 전부다. 경험한 모든 일은 자신의 내면에 크고 작은 이야기로 저장되었다가 발설할 만한 조건이 되면 반드시 이야기 형식으로 나오게 된다. 당신이 만약 바디랭귀지만을 쓴다 해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자신이 경험했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자기 입장에서 띄엄띄엄’ 내놓게 된다. ‘자기 입장에서 띄엄띄엄’ 내놓게 되는 이유는 기억의 한계, 의식의 한계, 언어의 한계, 관점의 한계, 생리적 한계 등등 수많은 제약 요인들 때문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당신만의 과거 기억도 뒤섞인다.
당신의 이야기는 단지 자신의 일을 재생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전혀 관계없는 처지인데도 당신은 ‘자신의 이야기’를 생산하기도 한다. 가령, 길에서 두 남녀가 한걸음 쯤 떨어져서 걷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됐을 때 당신의 이야기가 출발한다면?
‘흠, 두 사람이 싸웠을까? 부부는 아닌 것 같은데. 뭐지? 이혼하러 법원에 갔다가 나오는 길? 아니면, 저 여자가 시누이하고 다투고 나온 길일까?’ 만약 이 상황의 해석을 10명의 사람에게 듣는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10개의 스토리텔링이 만들어진다.
당신은 저 상황에 대한 자신의 추론이 맞다고 단정짓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심심풀이 추측일 뿐이야. 이럴 것이다. 나머지 열 사람 또한 마찬가지 마음일 것이다. 그런데 마침 당신이 다른 상황을 지켜보게 되고 또 다른 내면의 스토리텔링을 하게 된다면 어떤 스타일의 이야기를 만들게 될까?
사람마다 특정한 이야기 스타일이 있다. 추측이나 예상, 해석, 판단 따위가 작동하는 조건에서 번번이 돌아가는 패턴이다. 자신의 내면에 저장된 숱한 스토리텔링 중에서 비판, 비난, 미움, 혐오, 수치심, 적의, 두려움 따위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존중, 격려, 믿음, 긍정적 예측,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과 동떨어진 상대에 대한 생각이나 견해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머릿속 대상은 완전한 타인이지만 진실의 손가락은 모든 생각의 첫 번째 대상으로 ‘당신 자신’을 겨냥한다.
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의 모든 판단과 해석은 내 안에 저장된 ‘이야기’보다 더 완벽하게 검증된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당신의 무의식적 신념이다.
위 이야기의 부녀 중 아버지는 어떤 계기에 의해 자신의 ‘인생 스토리텔링 패턴’을 바꾸기로 결심했을지도 모르겠다. 내면에 저장된 숱한 이야기들은 의도적으로 주시해서 관리하지 않으면 심장이나 내장의 움직임처럼 무조건 반사운동만을 반복할 따름이다. 아버지는 그걸 알아차린 분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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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23일 오전 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