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으로 40년을 살아남은 이경규의 혁명적 커리어 ㄷㄷ>
1. 1981년 제1회 MBC 개그콘테스트를 통해 데뷔한 이경규는 40년 동안 방송에서 살아남았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강산이 네 번 변하는 동안 이경규는 계속 대중의 곁에 머물렀던 셈.
2. 이경규는 처음부터 솔직했다. 40년 동안 버럭했고, 화도 많았고, 독설도 많이 했다. 하지만 이런 캐릭터에 비해 그는 너무도 사건·사고가 없는 40년을 보냈다. 그 흔한 논란 한 번 겪은 적이 없었다.
3. 한 때 ‘국장급 개그맨’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예능가 캐스팅을 좌지우지 했던 권력을 갖고 있었지만 지금 와서 그에게 불합리한 일을 당했다고 온라인에 토로하는 단 한 건의 ‘폭로’도 역시 없다.
4. 대신 그 자리는 현란한 변신이 채웠다. 처음 이경규는 1980년대 당시 토크쇼 형식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MC의 곁을 채우는 보조 MC로 출발했다.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 MC였던 주병진의 옆에 있는 식이다.
5. 그렇게 연명하던 그가 크게 튀어오른 이유는 당대의 유행을 빨리 알아채고 반영했기 때문이다. 짜여진 대본으로 움직이는 예능가에서, 상황만 주고 돌발적인 사건을 만드는 방식으로 출연자의 진짜 반응을 보는 ‘몰래카메라’는 혁명적인 형식이었다.
6. 사람을 속이는 형태의 코미디에 흥미를 느꼈던 이경규는, 1990년대 예능가의 주요 흥행공식이었던 공익예능에도 참여했다. ‘양심냉장고’가 대표적이다.
7. 2000년대 예능가의 흐름이 리얼버라이어티로 바뀌자 ‘무한도전’ 만큼 성공적은 아니었지만 ‘남자의 자격’에 참여하면서 흐름을 탔다.
8. 지금까지 이경규는 자유롭게 활동하면서도, 한 번도 대중의 민감한 감성을 건드리는 행동을 하지 않는 자제의 능력도 갖고 있다.
9. 분명 유재석의 시대도, 강호동의 시대도, 신동엽의 시대도 왔다가 갈 수 있다. 하지만 이경규의 시대가 저물겠느냐는 예상은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한국 예능의 태초에도 그가 있었고, 지금도 그가 있다. 981년도, 2021년도 여전히 이경규의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