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모트워크 - 스페인 말라가》 생각이 바뀌었다. 선입견에 부끄럽다. 1. 독서가 좋아졌다. 아침에 책을 읽는 게 이렇게 행복한 건지 몰랐다. 몇년 전 프랑스 가족들과 남부로 휴가를 갔을 때, 한 가방을 책만으로 채운 시어머니를 보고 놀랐는데, 이제 그게 오롯이 이해가 된다. 해변에서 책 읽는 한 달은 그녀에게 천국이었으리라. 지금 내 가방에는 책이 한권도 없지만, 태블릿에는 미리 다운받은 책과 유럽와서 산 책이 가득이다. 우주에 대해 철학적, 과학적으로 접근한 책을 특히 좋아하고, 세상에 대한 큰 그림을 단순하고 쉽게 풀어준 책이 좋다. 한글판 내용이 좋으면 원서로 다시 읽기도 한다. 원하는 책을 거의 즉시 읽는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어제는 ‘그믐’이라는 장편 소설과 ‘2030 축의 전환’을 샀다. 일 년에 적어도 두 번은 책만 읽으러 가는 여행을 해야겠다. 백팩에 수영복과 태블릿만 넣어서, 좋은 사람들과 한달 동안 따뜻한 곳에서 책을 읽으며 지내야겠다. 이건 희망이 아니라 결심이다. 2. 아침이 좋아졌다. 그동안 아침이 - 특히 평일 아침이 - 싫었던 건 내 문제가 아니었다. 아침이면 시작되는 출근길, 업무처리, 바쁨, 전날 야근 피로.. 그게 싫었던 거다. 그런 아침을 최대한 늦게 시작하고 싶은 건 게으름이 아니라 당연한 거다. 게으른 인간은 없다. 하기 싫은 일을 끝까지 안 하는 인간이 있을 뿐. 그런 의미에서 나는 게으른 인간이고, 그것은 내 본성이다. 원하지 않는 걸 안 할 자유. 여기 와서 알았다. 원하지 않는 것들이 사라진 아침은 천국이 될 수도 있다는 걸. 7시 45분에 뜨는 해를 맞으려고 한 시간 전에 일어나서 커피를 만들고 샤워하는 나를 보면 아직도 낯설다. 그런 나는 한국에서와 다르게 ‘부지런하다’. 하지만 그건 껍데기고, 좋아하는 걸 조금이라도 먼저 맞으려는 건 사실 본능이다. 하고 싶은 걸 맘껏 할 자유. 이렇게 일찍 일어나면 당연히 일찍 잠든다. 일찍 잠들면 세포 재생도 잘 되고, 호르몬도 제대로 작동해서 과식도 안 하고, 감정도 안정적이다. 특별한 욕심도 집착도 없다. 매일 천국을 경험하는데 ‘안 되면 안되는 일’ 이라는 게 뭐 있겠는가. 3. 이상형이 달라졌다. 나는 원칙있고, 주장있고, 말 잘하고 똑똑한 사람이 좋았다. 자기 생각을 논리적으로 말하는 사람, 아침 일찍 일어나서 단장하는 사람, 모든 옵션을 확인하고 결정하는 사람, 감정 관리를 잘 하는 사람, 자기 관리를 위해 매일 운동하는 사람, 북유럽의 건조함과 뉴욕의 분주함을 가진 사람, 나는 그런 모습이 되고자 했고, 그런 사람들과 있고 싶었다. 남편에게도 그걸 요구했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의 사람들이 편하다. 자기가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 다른 걸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해를 봐도 웃는 사람, 같이 치팅데이를 즐기는 사람, 그냥 이걸로 하자고 쉽게 결정하는 사람,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땀흘리는 게 정말 좋아서 운동하는 사람, 남유럽의 픙부함과 캘리포니아의 여유를 가진 사람. “아니”라는 말보다 “괜찮아”를 자주 말하는 사람. (아모리, 그동안 미안했어) 물론 나는 아직 이 이상형에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방향성은 확실히 전환되고 있다. 내 인생이 남에게도 진실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이후, 기껏해야 3차원밖에 인지하지 못하는 부족한 인간이, 강아지보다 못한 후각 청각을 가진 인간이 누군가에 대해, 혹은 무언가에 대해 옳고 그름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워졌다. 가장 우스웠던 건 과거의 나였다. _ 앞으로 느는 스페인 말라가에서 4주를 더 지내고, 이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2주, 보르도에서 2주, 파리에서 3주를 지낸다. 그 시간 동안 또 어떤 내 선입견이 뒤집힐까. 생각만으로도 웃음이 나온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니게 바뀔 걸 뭐 그리 집착하며 살았는지. 이렇게 길게 쓸 포스트가 아니었는데 아름다운 음악과, 감동적인 바다와, 클리쉐하다는 걸 알면서도 찬란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아침 햇살에 나도 모르게 생각이 길어졌다. 아침 8시 54분, 이제 아침 먹으러 가자.

2021년 11월 10일 오전 9:54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