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해도 괜찮아 - 핀란드의 "실패의 날"]
핀란드 사람들은 어느새부터인가 10월 13일을 "실패의 날"이라고 하며 기념하고 있습니다. 공휴일이라거나 공식적으로 큰 행사가 열린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각종 SNS에 '내가 이런이런 실패도 해봤어'라는 경험담이 올라오지요. 올해도 어김없이 실패 자랑(?)이 이어졌네요 ㅎㅎ
1. 제가 가지고 온 링크는 여러 실패 자랑(?) 중에서도 알토대학교가 어제 공개한 모 교수의 실패담입니다. 20대 초반 어린 패기에 인생 계획 다 짜 놓았지만, 원하던 프로젝트에서는 떨어졌습니다. 이후 그의 커리어는 20대의 완벽한 미래 계획과는 사뭇 다르게 흘러갔다고 합니다. 때로는 원치 않은 연구 프로젝트에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배치되기도 했죠. 그렇게 어라? 어라? 하면서 인생은 흘러갔지만 -- 다 지나고 보니 그것도 인연이었다더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핀란드의 "실패의 날"은 이렇듯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본인이 원치 않았던, 예기치 못한 외부 요소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2. 핀란드 사람들이 실패를 이렇게 서로 공개하고 축하(?)하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습니다. 핀란드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수줍음이 많고 낯을 가리는 편인데요, 그래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을 불명예스러운 것이라고 여기는 문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유럽과 러시아 사이에 낀 지리적 위치 탓에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눈치 게임을 해야만 했던 역사적 배경도 있고요.
3. 핀란드의 실패에 대한 인식을 180도로 변화시킨 것은 의외로 노키아의 몰락이라는 어마어마한 실패였습니다. 핀란드는 2000년대 후반 노키아가 몰락하며 충격적인 경제적 위기를 겪은 바 있지요. 참고로 노키아는 당시 핀란드 경제 그 자체를 먹여 살리던 존재였습니다. 노키아의 몰락은 핀란드라는 국가의 실패로도 여겨졌죠. 실업률은 초고속으로 상승했고 젊은이들은 졸업과 동시에 구직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때 젊은이들이 '당장에 할 것도 없고... 뭐'라며 패기 넘치게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노키아의 몰락이라는 거대한 실패 앞에서 핀란드 젊은이들이 나름의 해학적 놀이판(?)을 만들게 된 겁니다.
4.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나와서 노키아에 취업해서 살아간다"라는 인생 계획이 한순간에 무너지던 순간, 핀란드 젊은이들은 "당장 취업이 안되어도, 죽지 않아!" "실패해도 살아!" 라며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물론 그 뒤에는 핀란드의 청년의 의식주를 일정 수준 보호해주는 복지 정책, 무상등록금 제도 등이 뒷받침되어있긴 했습니다.) 그중 일부는 "취업이 안되면 그럼 창업이라도 해볼까?" 라며 삼삼오오 모여 고기를 구워 먹으며 미래 고민을 했지요. 이 미래 고민 + 고기 + 술이 뒤섞인 사교 모임은 점차 공식적인 모임으로 발전했고, 핀란드 스타트업 생태계를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 중에 하나가 유럽 최대의 스타트업 행사 "슬러시" 그리고 핀란드를 대표하는 스타트업 커뮤니티 "알토이에스"이지요.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슬러시"와 "알토 이에스"가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10월 중순의 어느 날이 실패의 날로 기념되기 시작했습니다.
여담) 올해는 핀란드 젊은이들의 활동이 다소 둔화된 상황이긴 합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슬러시" "알토이에스" 모두 오프라인 모임이 중단된 상태이고, 일부 대학 캠퍼스에서 집단감염이 일어나는 탓에 '우리 같이 모여서 뭔가 해보자!'를 시작해보기도 힘든 지경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의 날은 온라인으로 이어지는군요. 집 안에 꽁 틀어박혀서, 우울하기 짝이 없는 핀란드의 가을을 버텨가면서... 핀란드 사람들은 그다음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이 나라, 희한한 동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