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에 어김없이 나타나 회사원을 괴롭히는 것이 비전과 성과 지표(KPI)다. 다 회사 잘되게 하자고 시작했겠지만, 불행히도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시간과 노력만 뺏는 성가신 일이다. 경영자의 뜻을 내세워 사람들을 틀어쥐고 휘두르려는 속뜻이 보이는 순간 그나마 남아 있던 의욕마저 사라진다.
코앞의 현안에 얽매여 회사가 어디로 가는지, 또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는 회사는 망한다. 그래서 경영자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구성원들을 이끌어 간다. 하지만 그 비전이 현실과 동떨어지면 황당한 망상이 되어 버리고, 우아하고 모호한 말로 포장만 요란하면 아무 소용없는 말장난에 그치고 만다.
비전이야 원래 몇 년에 한 번 사장이 바뀌면 내걸었다 잊어버리는 일이고, 그 틈에 끼어든 용역 업체는 돈 벌고 떠나면 그만이다. 하지만 잘못된 성과 지표(KPI)는 일하는 사람들의 목줄을 틀어쥐는 수단이 되니 사정이 다르다.
전략은 미래를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그 미래를 위한 노력들이 지금 제대로 결과를 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진도를 못 나가는 곳은 해결하든지 목표 자체를 바꾸는 수정 작업들이 필요하다. 온갖 좋은 얘기를 다 늘어 놓아도 실천이 불가능하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성과 평가의 과제다.
성과를 측정하고 평가해야 이해관계인들에게 설명할 수 있고 구성원에 대한 보상에도 기준을 삼을 수 있다. 그런데 세상만사가 수많은 사람들의 별의별 사연들과 얽혀 있는 회사 일에 잘잘못을 가리고 원인을 따져 개선하는 일이 쉬울 리가 없다.
궁예와 같이 미륵관심법으로 세상만사를 한눈에 꿰뚫어볼 수 있다면 일이 훨씬 쉽겠지만, 불행히도 현실에서는 그 능력마저 세상에 인정받아야 한다. 숫자로 딱 떨어지기 어려운 중요한 일들을 생각하면 도대체 무엇을 측정해 어떻게 평가할지 난감하다.
기업은 주주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해 그 결과를 주가 차익이나 배당을 통해 가져가려고 만든 조직이다. 따라서 주가와 이익은 기업의 최종적인 성과 지표(KPI)인데 이를 경영학, 특히 재무 분야에서는 ‘압축적 성과 지표(Crystalized Performance Indicator)’라고 한다.
세상만사가 엉켜 돌아가면서 회사에 영향을 주는 판에 어떤 부문의 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주가와 이익에 영향을 주는지를 알기란 사실 어렵다. 회사의 미래를 책임지는 경영자는 미리 대응하면서 그 영광과 책임을 감당하지만, 특정 부서의 책임자나 더 작은 단위의 담당자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책임만 뒤집어쓰기 십상이다.
그래서 기업 전체의 전략 목표를 부문별로 나누고 다시 더 작은 단위로 배분해 성과를 평가하는 ‘목표 관리(MBO)’ 기법이 쓰인다. 재무적 성과, 특히 수익률을 중심으로 하는 목표 관리는 측정 단위별로 구체적인 소임을 정의하고 그 달성도를 평가하는 ‘핵심 성과 지표 관리’로 진화했다.
그런데 대규모 플랜트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는 무엇보다 공기 내에 일을 마무리 짓는 일이 중요하다. ‘원가 절감’과 같이 숫자가 나오는 일에 집착하면 더 큰 목표를 놓치게 된다. 경영의 기본기를 갖추고 전략의 방향을 공유하는 일이 우선인 인재개발원에서 ‘수강생 만족도’와 같은 당장 숫자로 보여지는 목표를 앞세우면, 동네 문화센터 수준이 되어 버린다.
성과 지표(KPI)는 쓸 만한 계기판으로 나름의 쓰임새가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영 기법이 그렇듯이 그 쓰임새를 넘어 뭔가 더 대단한 일을 한다고 우기면서 문제가 생긴다. 물론 그 문제는 관리 통제를 권력 수단으로 삼으려는 리더의 한심한 짓에서 시작된다.
A전자는 기업 전반의 관리를 재무본부가 주도한다. 각 사업 단위의 성과 지표들이 주가와 이익에 주는 영향을 화폐 가치로 환산하고 위험에 노출된 규모까지 계산해 참신한 기법이라는 반응을 얻고 있다. 그런데 해외 시장 개발, 플랜트 유지/보수 같은 비재무적 활동들을 환산하려면 결국 관리자의 주관이 좌우하게 된다. 경영자에게는 이런 가정이 숨겨진 왜곡된 평가만이 전달될 뿐이다.
B그룹은 새로 인수한 중공업 계열사에 부문별, 팀별, 개인별로 촘촘하게 설계된 성과 지표를 부여하고 상대평가를 통해 인사와 보상에 반영한다. 철모르는 누군가의 눈에는 ‘성과주의’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사실 B그룹은 각 평가 단위들이 실적을 챙기기위해 서로 정신없이 다투는 상황을 분할 지배의 기회로 쓰고 있다.
교수를 연구 업적으로 평가하면 쓰레기 논문을 찍어 내면 그만이고, 강의평가로 하자니 쉽고 만만한 과목으로 대충 때우려는 대학의 현실이 참담하지만, 업적 평가는 여전히 ‘노무 관리’의 수단으로 쓰인다. 사고 없는 군대를 만드는 것은 안전사고를 줄이는 수 밖에 없는데, 힘들고 위험한 야전 훈련을 하지 않으면 성과가 좋아지는 모순이 발생한다.
그럼에도 교수들에게 논문 숫자를, 군인들에게 사고 건수를 들이대는 것은 물정 모르는 지방관을 업고 건수 잡아 휘두르는 ‘아전 권력’과 다를 바가 없다. 유능한 경영자는 현장의 분위기, 일하는 사람들의 말투만 봐도 속사정을 읽을 수 있다.
핵심 성과 지표는 자동차의 계기판과 같이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더 살펴 생각해 볼 계기를 찾는 수단일 뿐이다. 억지로(그것도 주관적 평가까지 곳곳에 심어 놓고) 합산해 숫자로 들이대고 줄까지 세워야 평가할 수 있는 경영자라면 빨리 사표를 내는 것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