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을 마치다. -2-

지난 이야기

사수없이 신생 개발팀의 유일한 디자이너가 되어 버린 신입 프로덕트 디자이너.

이 험난한 스타트업 생활에서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


동갑내기 기획자와의 만남

CTO님은 원래 기획자와 UI 디자이너를 각각 고용할 생각이셨다고 한다.

프로덕트 디자이너라는 직무를 모르셨던 CTO님은, 그래서인지 나의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보고 바로 고용을 결정하셨던 것.

문제는 프로덕트 디자이너도 UX 디자인, 즉 기획의 영역에서 욕심이 없잖아 있는지라.

서비스 기획자와의 상성이 썩 좋지 않다는 이야기들을 들어온 터였다. 걱정 반, 기대 반.


사수도, 동료 디자이너도 없이 홀로 디자이너인 내게, 시각 디자인과 경영학을 이중 전공하셨다는 기획자님은 가뭄에 단비였다.

물론 처음에 기대한 바와는 달리 기획자님은 디자인 자체에는 큰 흥미가 없어보이셔서 아쉬움이 없진 않았다.

서비스 기획에 도움이 될까싶어 디자인을 전공했다고 할 정도니까. 그만큼 기획에 진심이신 분이셔서, 한편으로는 든든하기도 했다.


기획자 님이 동갑내기인 것에 힘입어 나의 회사 생활은 그래도 퍽퍽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혼자서 디자인 시스템을 구축해두고, 프로젝트 기획 회의에서 제안서 발표하고, 팀 운영 시스템 구축을 해보려고도 노력하고 했던 2달.

동갑내기인 기획자 님이 안계셨더라면, 아니면 기획자 님이 시각 디자인을 전공하지 조차 않은 분이었다면 외로운 것도 둘째치고 업무에 갈피를 못잡았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서비스 기획자와 프로덕트 디자이너의 업무 분장

앞서 고민했던 기획자 님과의 R&R 문제.

이제 막 프로젝트가 급박하게 시작하자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중에서 가장 치명적으로 느끼고 있는 문제는

바로 프로덕트 디자이너인 내가 UX 디자인에 어느 정도 관여할 수 있는지- 에 대한 문제.


기획자 님과 나의 R&R에 대해서는 사실 CTO님의 우려로, 기획자님이 입사하시기 전부터 계획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다소 어렵지 않아보이는, 전사적으로 마감기한이 딱히 정해져 있지는 않으나 재미있어 보이는 프로젝트를 메인으로 담당하게 되었다.

기획자 님은 자연스럽게 전사적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한눈에 봐도 복잡하고 어려운 도메인의 프로젝트를 맡게 되는데...


처음에 꿀이라고 생각했던 업무 분장...이었는데 최근 들어 별로 꿀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내가 담당하게 된 프로젝트들의 우선순위가 높지 않기 때문이다.

마감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기획/디자인 단계에서 얼마든지 내가 일정을 산정하고 자유롭게 진행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이말은 바꿔 말하면, 아무도 내 프로젝트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 않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팀의 유일한 프로덕트 디자이너인 나는, 기획자님의 기획서 하에 "UI 디자인"을 주로 하다, 최근에야 끝을 냈다.

기획자 님과 처음 합을 맞춰보는 것이라 커뮤니케이션 방법이나, 개발단까지 포함하는 전체적인 업무 파이프라인을 구축하는데에도 물론 시간이 좀 들었다.

문제는 기획자 님조차도 프로덕트 디자이너와의 업무가 처음이셨고(나도 그렇고), 주로 합을 맞췄던 디자이너는 UI/GUI 디자이너였다는 것.

기획자 님은 자연스럽게 UX 디자인에 대한 전권을 가지고 가셨다.(원래 논의했던 바 대로이긴 하다)

그럼에도 나름대로 열정적으로 UX 개선을 위한 수정 제안을 무수히 남기던 것이 불과 2주 전의 일.

기획서를 꼼꼼히 보지 않거나 기획자의 권리를 침범한다고 느낀다-는 기획자 님의 조심스러운 피드백에 한 풀 꺾인 것이 지난 주.

그래, 기획서대로 그리지 않은건 내 잘못이지.

다시 기획서의 화면설계 그대로 스크린을 디자인하고(사실 이것도 디자인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컴포넌트를 얹는 것 뿐이잖아!) 제안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 이번주 까지의 일.

그러다가 이번주 어느 날, 개발 상에서 고려해야 하는 edge case에 대한 정책을 기획자님께 요구했다가 이미 개발단에는 따로 전달 하셨다는 말을 듣고 현타가 와버렸다.


''서비스 기획자'님의 메인 프로젝트를 도울 때 나는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아니어야 하나보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디자인하면서 개발 상의 이슈를 고민하던 것이 화근이었다.

거기에 UX 디자인에 대한 제안들이 이리저리 중첩되면서 기획자님 역시 스트레스가 있으셨을 것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 프로젝트에서 나는, 그저 화면을 그리는 사람의 역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기획자님조차 내가 UI 디자이너로서의 Role을 수행하기를 기대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자, 이 조직에서 내 존재의 의의를 그만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 다음 날은 울적하게 가라앉은 하루를 보냈다.

더이상 처음처럼 UX 디자인에 대한 개선안을 제안하고 싶지가 않아졌다.

하루 업무의 작지 않은 시간을 해당 프로젝트에서 제안안을 내는데 쓰고 있었는데, 그중 거의 1/3이 특별한 근거 없이 반려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내 시간이 아깝기도 했고 반발심이 들었다. 물론 제안이 반려된다고 제안 자체가 의미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좀더 주도적으로 프로젝트를 이끌고 싶은 내 마음과 이 프로젝트의 업무 분장은 썩 어울리지 못했다.


그리하여 어제부터는 기획자님이 오시기 전부터 내 담당이었던, 잠시 살포시 접어두었던 내 메인 프로젝트들을 꺼내어 다시 갈고 닦는 중이다.

아직까지는 여전히 팀 전체 단위에서 업무 우선순위가 높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내 프로덕트를 뛰어난 동료들과 완성시킬 것을 생각하고 기운내려 한다.


다르니까 배울 점도 많다.

기획자 님은 오늘도 바쁘다. 2주 쯤 전부터 이리저리 항상 잔업에 바쁘셨는데,

이제는 개발단에 디자인과 최종 기획안이 핸드오프되어 다른 프로젝트에 투입된 상황이라 더 바쁘시다.

마감 일정을 맞추기 위해, 나는 12월 말에 배포할 버전에야 디자인을 입히기로 배려해주셨다.


당장은 마음이 놓이지만 한편으로는 팀에서 내 역할이 점점 줄어드는 것만 같아 기분이 울적하다.

사수가 있었다면 이런 시행착오를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게다가 외롭지 않았을텐데 싶다.

프로덕트 디자이너 채용을 현재 진행중인데, 2명의 면접을 CTO님과 함께 보기로 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면접자 입장이던 내가 면접관으로 면접에 참여한다니 기분이 묘하다.

물론 동아리 운영진으로 더 높은 연차의 디자이너들도 면접 본 경험이 있긴 하지만, 앞으로 내가 직접 함께 일하게 될 팀원을 뽑는 것이다보니 오히려 더 떨린다.

CTO님이 처음으로 만난 프로덕트 디자이너이었기 때문에 나는 어쩌면 과대평가 받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자격지심이 더 커지지 않도록, 다시금 열심히 잘 일하도록 분투해야겠다.


그리하여 오늘은 금요일이라 업무 회고를 겸해서 개인 업무 메뉴얼을 만들어 보았다.

UI 디자이너의 역할만 해야하는 메인 프로젝트와, 서비스 기획부터 디자인, PM까지 전방위 역할을 해야하는 개인 프로젝트에 대해서 어떻게 우선순위를 설정하고 매일의 일과를 보낼 것인지에 대해서 좀 체계화시켜 보았다. 사수가 없는 만큼, 스스로 더더욱 체계를 만들고 지키고 개선하는 과정을 멈춰서는 안 된다. 그래야 이곳에서 혼자 일하는 시간이 값질테니까.


결과적으로 메인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좀더 그래픽 리소스도 제작하는 등 '디자이너' 성격의 일들에 집중하려 한다.

생각해보면 UI/UX 디자인 자체는 기획자가 넘겨주는 대로 그리면 될 뿐이니까, 오히려 그래픽 디자이너로 Role 하는 것이 더 창의적인 업무일지도 모른다.

그 부분은 내가 약한 부분이기도 하니까, 스터디 하면서 회사 다닌다고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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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0일 오전 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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