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양 빠지지 않고 근사하게 쪽팔리는 비법
브라보마이라이프
“결혼 생활은 쪽팔림의 연속이에요. 서로가 서로한테 쪽팔려요. 쪽팔려도 가장 나를 이해하고 믿어줄 거라는 그러한 믿음 하에 쪽팔림을 그냥 겪고, 또 그걸 겪으면서 감당해나가는 겁니다.”
<오은영 리포트-결혼 지옥>에서 5년째 문자로만 소통하고 신체적•정서적 접촉이 전혀 없는 부부에게 내린 솔루션 말미에 나온 말이다.
실제로 부부의 삶이란, 결혼 생활을 해나가는 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자식한테, 자식이 부모한테 끊임없이 쪽팔려 하는 시트콤 같다. 품위와 체면을 잃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비단 결혼 생활 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가 비슷하다.
지난 추석 연휴에 케이블방송에서 영화 <접속>을 봤다. 개인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PC통신 대화방의 상대인 줄 모르고 지하철에서 우연히 마주 앉아 있던 두 주인공(한석규, 전도연 분) 사이에 한 청년이 손잡이를 잡고 선다.
말을 심하게 더듬는 그 남자는 물건을 팔 거라는 승객들의 예상과는 달리 이야기를 시작한다. 말이 유독 서툴고 어눌하지만 창피를 무릅쓰고 그 자리에 선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에 말버릇을 고쳐보려 용기를 낸 것이라고 한다. 사랑이야말로 쪽팔림을 기꺼이 감수하게 하는 마법이 아닐까?
버스에서 “여기서 내려요!” 이 말을 못 해서 내려야 할 곳을 지나쳤던 적이 있나? 기어드는 목소리로 부들부들 떨지라도 쪽팔림을 불사해야 하는 이유는 가야 할 곳을 가기 위해서다. 직장에서 첫 발표를 했던 순간을 떠올려보자. 윗사람한테 신랄한 평가를 받았을 때 좌절하지 않고 자신을 성장시키려면 역시 쪽팔림을 이겨내야 한다.
쪽팔림을 장벽으로 여겨서 주저앉을지, 징검다리로 생각해 다음 단계로 나아갈지 자문해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사랑도 일도 일단 저질러보자. 이럴 때는 ‘아니면 말고’와 ‘싫으면 말고’ 정신이 도움이 된다.
‘아니 젊을 때야 뭔 짓을 못 해.’ ‘내가 그 나이만 됐어도 그 정도는 껌이지.’ 이런 말로 주저하고 쭈뼛거리며 변명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가슴에 손을 올리고 조용히 물어보자.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필요한 것이 바로 쪽팔릴 줄 아는 마음가짐이다.
그렇다면 쪽팔리는 상황은 어떤 때일까? 우리가 무언가를 하지 않을 때는 부끄럽거나 치욕스러울 일이 없다.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무슨 말을 꺼내려 할 때, 그 마음먹은 바를 행동으로 옮길 때라야 비로소 쪽팔릴 일이 벌어진다. 나이를 걸림돌로 의식하지 않고 무엇인가 일을 도모하는 당신은 그래서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래도 이왕이면 모양 빠지지 않고 근사하게 쪽팔리는 비법은 없을까?
[근사하게 쪽팔리는 방법]
• 내가 실수한 것은 화끈하게 인정한다.
• 약속에 늦었을 때는 반드시 사과한다.
• 모르는 것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어디서나 물어본다.
• 사랑과 감사 표현도, 친구랑 만남도 내가 먼저 제안한다.
• 조언이나 의견을 먼저 구한다.
• ‘그 나이에 왜 굳이’ 이런 말을 하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먼저 인정하고, 사과하고, 질문하고, 고백하고, 고맙다 하고, 제안한다고 지는 것이 아니다. 사과해야 할 때 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야말로 훨씬 쪽팔리고, 면이 안 서는 것이다. 나이를 빌미로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게 말리거나 막는 사람을 조심하라. 뭘 하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자존심을 구기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존심 살리고 자존감도 높이는 행위이다. 다른 사람에게 묻는 것은 죽어도 못 하겠다면 하다못해 인터넷 검색을 해서 확인해도 괜찮다. 우리가 길을 잘못 들었을 때, 내비게이션대로 운전 하는데도 헤맬 때는 주유소나 주변 사람한테 물어보지 않는가?
‘근자감’은 ‘근거 없는 자신감’을 줄인 말이다. 지난 50년 가까이 수학계 난제로 남아 있던 리드 추측(Read's Conjecture)을 증명해서 필즈상을 거머쥔 허준이 교수가 모교인 서울대학교 학생들을 위한 강의에서 한 말이다.
그동안에는 과대망상이다, 허세다, 만용이다 하며 비웃음을 사거나 조롱감이 되었던 신조어가 바로 ‘근자감’이다. 그런데 ‘근거 있는 자신감’도 줄이면 근자감이 될 텐데 왜 줄여서 부르지 않는지, 허 교수 얘기에서 엿볼 수 있었다.
“성적이나 입상 경력 같은 근거 있는 자신감을 가진 사람은 여러 가지 불운한 일이 겹쳐서 힘든 과정을 만나고 그 근거를 잃게 될 경우 쉽게 부서질 수 있습니다. 반면 근거 없는 자신감을 지닌 사람은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는 힘든 과정에 놓일 때도 유연하게 자신의 목표를 변경합니다. 근자감은 인생을 끝까지 잘 살아가게 하는 큰 힘이 되더라고요.”
근자감이야말로 쪽팔림을 소화해낼 수 있는 바탕이자 에너지가 아닐까? 이것이 있기 때문에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없더라도 나는 잘 해낼 수 있다는 무조건적인 자신감이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 간절해진다. 그런 믿음이 있어야 쪽팔림을 당당하게 맞닥뜨릴 수 있다.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담은 허술하게 쌓은 것 같지만 강한 바람에 무너지는 법이 없다. 커다란 현무암 사이에 생긴 틈이 바람이 다니는 길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돌 사이 빈틈이 담장을 살리고 금이 간 틈새로 빛이 들어오듯, 사람의 틈이 관계를 숨 쉬게 하고 살리게 하는 묘책이 된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구슬 목걸이를 만들 때 일부러 흠집 있는 구슬 하나를 꿰어 넣는다고 한다. 그 구슬을 ‘영혼의 구슬’(Soul Bead)이라고 부르는데 ‘모든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혜를 담고 있다고 한다.
고대 페르시아에서도 최고급 카펫을 짤 때 아주 작은 흠 하나를 굳이 짜서 집어넣었다. ‘페르시아의 흠’(Persian Flaw)이라 부르는 이 행위는 ‘영혼의 구슬’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완벽할 수 없으며 불완전한 존재라 믿기 때문이라고 한다.
빈틈이나 흠결을 들킬까봐 전전긍긍하지 말자. 자신에게나 상대에게나 완벽한 잣대를 내려놓은 채 ‘근자감’을 등에 업고 ‘쪽팔릴 줄 아는 용기’로 무장한다면 세상에 두려울 것 하나 없는 멋진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지닌 틈과 흠에서 아름다운 빛이 나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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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2일 오후 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