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러나고 있는 중입니다> 1. 모른다는 것에 불안해지지 않기로 했다 스무 살엔 서른이 되면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확히 36살을 넘어 37살로 넘어갈 때쯤엔, 누구와 만나더라도 어떤 일을 맡더라도 능수능란하게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작 37살이 되니 할 수 있는 것보다 참고 기다려야 할 일이 더 많았다. 실무 책임자로 가장 먼저, 빨리, 열심히 뛰어야 하는 위치였다. 일에 능숙해지는 만큼 책임의 무게도 거뜬히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웬걸. 더 무거워졌다. 방송사의 일이란 것이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스텝들의 협조를 얻어야 하고, 협력과 설득의 반복 과정이다. 대개는 장기 프로젝트라 반짝이는 결과보다 꾸준함을 지속시켜나가는 힘이 더 중요하다. 고무줄을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잡아당겨 버텨나가는 것과 같다. 결과물에 대한 책임은 책임프로듀서가 져야 할 몫이다. 책임을 회피하는 순간, 동료의 신뢰는 무너진다. 서른에서 마흔으로 넘어오며 배운 것이란 그 정도였다. 책임을 지는 법,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지치지 않는 법, 그러다 지치면 내가 지쳤다는 것을 자각하는 법 가급적 빨리 회복하는 법 그 정도. 올해 마흔다섯, 이젠 쉰 살이 되면 더 잘하겠지라는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내일 일도 모르는데 뭔 기대를. '어이구, 예전 같지 않아~', 똑같이 야근을 하고 나서도 회복이 더디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다음 10년에도 내가 책임을 지다고? 그 정도면 그 회사는 미래가 없는 거다. 요즘 자주 다음 10년의 주인공을 길러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후배가 질문했다. 늘 성실하고 진지해서 가끔은 힘을 빼고 유쾌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친구다. '후배가 질문을 하는데 모르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요? 그리고 제 대답에 반대할 때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그는 지금, 정확히 자신이 감당해야 할 질문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적지 않은 나이와 경험에도 불구하고 모든 질문에 자신 있게 답을 주지 못하는 어중간한 위치. 답을 하고서도, 찜찜함에 다시 선배에게 물어봐야 하는 막연히 아는 정도, -하지만 선임자로서 존중받고 싶고 -그래서 질문과 반대에 예민해지는 지점에 서 있었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해라.' - '네?' 그는 맥이 풀린 듯 되물었다. '나도 모르니까, 같이 알아보자고 하면 된다구. 대신 그게 회피가 아니라, 진짜 열심히 알아보고 알려주면 돼' 그는 피식 웃었다. '나도 네가 나한테 질문하면 내가 아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이 맞는지 마음속으로 점검을 해. 내가 아는 것이 그저 선배가 가르쳐줬던 관행이었는지. 여전히 적용되는 지식인지. 체계가 잡힌 게 아니라, 듬성듬성한 것인지 고민을 하거든. 그렇게 고민하다 보면, 아니다 싶을 때가 있어. 그럴 땐 나도 널 통해서 새로 배워야 하거든. 방송 일이란 게 계속 새로운 시스템이 나오고, 트렌드가 변화하기 때문에, 어쩌면 나보다 네가, 너보다 후배들이 더 잘 아는 게 있을 수 있어. 그게 당연한 거야. 그러니까 네가 아는 걸 이야기해주고, 아닐 수 도 있다는 점도 늘 염두하면 돼. 그리고 이젠 네가 알고 있는 걸 조금씩 정리해봐.' 지식이란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깊이까지 녹여들어가는 시간에서 얻어지는 것 같다. 지혜는 평소엔 깊이 가라앉아 있다가 큰 소용돌이가 칠 때마다 드러내 준다. 유유히 흘러가는 평범한 일상에서는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분간이 안될 때가 많다.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무척 막연해진다. 잔뜩 많이 모아둔 것 같지만 뒤죽박죽 섞여 있다. 내가 남에게 배운 것은 무엇이고, 내가 스스로 깨달은 것은 무엇인지 구분되어 있지 않다. 내가 정확히 아는 분야가 무엇이고, 대충 어물쩍 아는 주제가 무엇인지도 애매모호하다. 지혜와 지식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체계를 세우는 것, 그만큼 내가 습관적을 해 온 것에 대해 삐딱하게 봐줄 사람도 필요하다. 후배들의 질문이 그런 역할을 해준다. 경험과 시행착오를 거쳐 쌓은 나의 경험이 과연 응당 그래야 하는 것일까? 과거의 지식이 여전히 유용할까? 그런 고민은 전해주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구분하게 해 준다. 지식도 지혜도 분리수거가 필요한 것 같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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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28일 오전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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