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글서글한 디자인> “모든 것이 디자인은 아니다. 그러나 디자인은 모든 것과 관련 있다.” — 디자인으로 세상을 배웁니다. * 오징어게임 단상. 넷플릭스에서 개봉된지 꽤 지났음에도 여전히 <오징어게임> 열풍은 사그라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도 한번 디자이너로서 기호, 공간, 대비라는 개념을 가지고 짤막한 생각을 공유해 보고자 합니다. 1.기호 프랑스 파리에서는 오징어게임을 체험하고자 3,000여명의 인파가 몰렸다고 하지요. 팝업 스토어와 관련된 글들을 보니 꽤 흥미롭습니다. 요소요소가 마치 내가 드라마 속에 있는 것 같이 매우 디테일하게 표현되어 있고 긴장감도 유발하면서 게임에 통과하게 되면 넷플릭스 1개월 무료 쿠폰을 주는 등 재미가 쏠쏠해 보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주목을 끄는 것은 단순한 도형이 그려진 가면을 쓰고 핫핑크 점프수트를 입은 팝업 스토어 진행요원들입니다. 여느 이벤트와는 달리 고객들은 진행요원이 움직이는 고개의 방향에 따라 시선을 감지할 수 있을 뿐 전혀 감정적 소통을 할 수 없습니다. 드라마에서도 당최 표정을 알 길 없는 참가자들은 원형, 삼각형, 사각형의 도형 너머로 무지에서 비롯된 긴장감과 나아가 공포감 마저 느낍니다. 색의 3원색이 빨강, 녹색, 파랑인 것처럼 원형, 삼각형, 사각형은 모든 형태의 기초가 되는 도형들입니다. 여기에는 우열의 개념도,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그러나 참가자들은 점점 원형과 삼각형과 사각형이 계급과 권력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원형이 그려진 가면을 쓴 사람들은 ‘일꾼’이라 부릅니다. 검은색 바탕에 굵은 선으로 그려진 빵빵한(?) 정원의 형태는 그 수가 많을수록 일사분란함 속에 위압감을 줍니다. 한 개의 원형은 평범하지만 무수히 반복되면 강조가 됩니다. 삼각형이 그려진 가면을 쓴 사람들은 그 일꾼들을 통제합니다. 그들은 살상무기를 소지하고 있으며 탈락자들을 즉결처리 하는 무시무시한 권한을 지닙니다. 참가자 눈 앞에 일대일로 서 있는 삼각형은 죽음 아니면 생존을 의미하는 기호로 변합니다. 그리고 프로그램 진행을 현장에서 제어할 수 있는 사각형이 그려진 가면을 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가장 적은 수의 인원이지만 아래 계급이 간단한 질문조차 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밌게도 가장 큰 권력은 아무런 기호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 권력의 정점에는 맨 얼굴의 일남(오영수 분)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맨 얼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가장 Ntural 한 상태. 어느 것에도 구속됨 없는 자유. 스스로의 행위 그 자체가 언제든 의미와 룰이 될 수 있는 자유말입니다. 직장인들이 사업을 꿈꾸고 경제적 자유를 꿈꾸는 이유 아닐까요? 2. 공간. 거대한 “영희”가 죽음의 레이져를 쏘는 공간은 파란 하늘 아래 금빛 갈대밭 이미지가 펼쳐져 보입니다. 그림이 아닌 실사를 통해 선명한 이미지를 보이고 있지만 오히려 초현실주의 작품같이 비현실적입니다. 영화 <트루먼쇼>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바다에 배를 띄우고 저 멀리 푸른 수평선 너머 모험의 세계가 펼쳐질 것 같은 기대에 찬 트루먼의 표정은 “탁”하고 배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어리둥절함으로 변합니다. 트루먼의 모든 현실이 한낱 “쇼”에 불과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이지요. <오징어게임>에서는 “탕”하는 총성과 함께 죽음이라는 현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현실의 문제(돈)를 안고 비현실적인 공간(섬)에서 끔찍한 현실(죽음)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첫 총성이 울린 이후 모든 공간은 그것이 표현하는 이미지와 상관없이 삶과 죽음을 가르는 사생결단의 공간으로 변합니다. 3.대비. <오징어게임>은 대비의 극대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단연 시각적 대비는 큰 임팩트를 주고 있습니다. 채도 높은 핫핑크는 원래 경쾌하고 가벼운 느낌을 주지만 <오징어게임>에서는 오히려 위압감과 무거움을 극대화하는 요소로 사용됩니다. 게임을 하기 위해 이동하는 계단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디저트 샵처럼 달콤함이 느껴지는 발랄한 파스텔톤의 색감은 극적인 대비가 되어 오히려 마른침을 삼키는 씁쓸하고 침울한 느낌마저 들게끔 합니다. 대비는 “예상을 뛰어넘는 어떤 것”입니다. 의외성, 이질감, 이색감이 주는 새로움입니다. 만일 <오징어게임>이 의미를 강조하는 방법으로 대비가 아닌 강화의 방법을 사용했다면 의미와 디테일은 강조가 되었겠지만 시각적 임팩트는 지금보다는 약했을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시각적인 대비의 극대화가 세계인들에게 큰 인상을 남기는 중요한 역할을 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대비의 극대화를 통해 새로움을 보여 준 브랜드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젠틀몬스터가 만든 베이커리 브랜드 “누데이크”입니다. 시그니쳐 빵은 검은 돌덩이(?) 같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먹음직스럽게 잘 구워진 짙은 브라운의 폭신한 빵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입니다. 극과 극입니다. 또 이를 표현한 포스터 디자인은 거친 숯이 연상되는 질감으로 녹색(??) 마그마가 나오는 화산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베이커리 분야에서 한번도 시도된적 없는 기존 “빵의 전형”과 극적인 대비를 이룬 누데이크는 새로움을 탄생 시켰고 MZ세대의 열광을 이끌어 냈습니다. 심지어 맛도 있습니다. 4. 극에서 극으로 이동 시키는 도구, 디자인사고. 저는 누데이크가 젊은 세대의 인기를 얻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베이커리 분야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였다는 데에 있다고 봅니다. 누데이크로 인해 물꼬가 틔어지고 베이커리계에서는 이제 새로운 시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놀라운 “혁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혹자는, “누데이크”는 “젠틀몬스터니까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성 기업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요. 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일반적인 기업에서는 이렇게 화산재 속에서 꺼낸 돌덩이 같은 검은빵을 연구결과로 제시했다가는 회사생활이 고달퍼질 수 있습니다. “이게 빵이냐. 맛없어 보인다. 제정신이냐. 누가 사먹겠냐 …. ” 일단 욕 한바가지 먹고서요. 하지만 현재 기업에 몸담고 있는 인하우스 디자이너로서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자이너는, 디자인팀은 끊임없이 “누데이크 같이” 시도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디자인조직은 10년이 되든, 50년 이 되든, 100년이 걸리든 기업에 언젠가 혁신의 물꼬가 틔어질 수 있도록 물길을 만들어 갈 숙명을 가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디자인을 제시할 때 크게 A, B, C안으로 제시를 합니다. A안은 전략적으로 가장 안전하고 무난한 안, B안은 그보다 조금 변형된 안, C안은 디자이너의 아이디어를 보다 반영해 더 진보된 안. 그런데 지금껏 저는 디자인 시안을 제시할 때, 반드시 “Z”안을 가져갑니다. 가장 “극”적인 시안입니다. 디자인사고와 귀추논리에 따라 디자인 타당성을 극적으로 확보한 예상을 뛰어 넘는 디자인을 선보이고자 매우 노력합니다. 당연히 Z안은 채택되지 않는 게 많습니다. 하지만 다음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조직에는 자극을 줍니다. 그리고 몇 개월, 수 년이 지난 뒤에야 개념이든, 형태든, 구조나 방법론이든 유사한 디자인들이 시장에 나오는 것을 보는 경우도 더러 있었고 아직 시장에서 보지 못한 것들도 있습니다. 예전 글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이 예상한 범주를 벗어나면 그것을 창의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보다 낯선 것으로 속단하려 한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조너선 아이브가 젤리 - 컴퓨터 기기와 젤리?? : 극과 극! - 에서 영감을 받아 투명한 아이맥을 디자인 했을 때 이미 내부를 가리고 열을 내보내는 기능에 충실한 각진 사각형이라는 “컴퓨터의 전형”이 존재하는데 결정권자가 이를 시장에 내놓기로 컨펌하기란 보통의 판단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강력히 반대했던 애플의 이사진들은 컴퓨터의 전형과는 너무나도 대비가 되는 이 디자인을 낯선 것으로 보았고, 스티브 잡스는 사탕처럼 다채롭게 투명한 이 디자인을 창의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디자인사고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뾰족하게 만드는 혁신의 도구이지만 이를 이해하고 의사결정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5.하고 싶은 말 링크드인 업데이트 내용 중 <HBR>에 실린 애플의 혁신적인 조직에 대해 요약한 글을 보았습니다. “전문가가 이끄는 전문가 조직” 늘 꿈을 꾸고 있기에 절절이 가슴에 와닿는 문장이었습니다. 고도의 디자인 작업에 대해 디자이너의 전문적 판단이 의사결정 단계에까지 반영될 수 있는 디자인문화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꼭 디자인 전문가만이 디자인 의사결정에 가장 결정적 역할을 해야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디자인에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 성공적인 디자인솔루션을 제시하는 IDEO 디자인프로세스에서는 공학자, 엔지니어, 인문학자 등 협업을 통한 시너지를 추구합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 디자인 전문가와 논의할 수 있는 디자인 이해도 *** 를 갖추고 수평적 관계에서 협업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란 것입니다. 애플의 모든 직원들은 디자인을 중시하는 문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공통의 개념으로 정립되어 있습니다. 조너선 아이브는 "디자인에 감사하고 지지할 수 있게 하는 엔지니어링 문화가 더 나은 디자인을 만든다"면서 "디자이너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사용자 경험과 디자인에 대해 생각하는 문화가 디자이너 개인 혹은 팀 보다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바 있습니다. 츠타야 서점을 창업한 CCC의 마스다 무네아키 회장은 미래에는 모두가 디자이너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자본론>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가 디자인을 전공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디자이너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즉 디자인사고를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나아가 디자인사고로 실제 일할 수 있어야 미래 시대에 생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디자인은 “부가가치”가 아니라 “사업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디자인 참여를 보면 디자인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도에 있어 참여자간 심한 불균형이 존재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래서는 혁신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디자인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이해도가 깊지 않은 상태에서 디자인에 관여하는 일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혁신의 방해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2021년 10월 21일 오후 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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