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장 실천하지는 못하더라도 일단 '임시 저장'은 해둬야 하는 이유 ]
01. 예전에 tvN에서 방영한 <현지에서 먹힐까?>라는 프로그램에서 이런 장면이 나왔습니다. 출연자였던 이연복 셰프님이 탕수육 레시피를 하나하나 상세히 설명해 주자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방송인 허경환 님이 이렇게 물었거든요.
"사부님. 근데 이거.. 방송에서 이렇게 레시피를 다 알려주셔도 괜찮으신 거예요?"
"응. 괜찮아. 어차피 하나하나 다 설명해 줘도 실제로 따라 해보는 사람은 1,000명에 한 명 있을까 말까거든. 그걸 자기 걸로 만드는 사람은 그중에서도 또 손에 꼽을 거고. 그래서 '그냥 이런 게 있다'고 보여주는 거지. 뭐 나중에라도 생각나면 그때 써먹을 수 있게."
02. 도입부터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의지나 실천력의 부족을 꼬집기 위함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 얘기를 하고 싶어 시작한 이야기이니까요.
운 좋게 책을 쓰게 되고 꾸준히 글로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덕분에 제게도 이런저런 루트로 질문이나 고민 상담을 해오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모든 분들께 하나하나 답변을 드릴 수는 없지만 제가 작은 도움이라도 드릴 수 있겠다 싶은 부분에선 나름의 솔직한 의견을 전달드리는 경우도 있죠.
03.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면 대부분 '고민되는 부분이 많이 해결된 것 같다', '생각이 좀 정리된다' 같은 긍정적인 답변을 주시지만 저 역시 그게 일시적인 효과일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질문을 주신 분도 그저 저를 매개체로 자신의 생각을 좀 더 구체화해보거나 집중해서 들여다봤을 뿐 제가 뭔가 뾰족한 대안을 제시해 드린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는 스스로 질문하고 답할 수 있게 도와드린 것뿐인 거죠.
04. 하지만 정작 흥미로운 지점은 따로 있습니다. 사실 제가 책을 통해 전달한 이야기나 이렇게 커리어리 등에서 올리는 이야기를 보고도 다음날 당장 시도해 봤다는 분은 거의 없습니다. (아직 한 명도 못 봤지만.. 그래도 '아예 없다'라고 하면 슬프니까 '거의 없다'라고 거짓말 한 번 해봤습니다.)
대신 이런 경우는 심심찮게 있습니다. '제가 ~ 요즘 이런이런 상황에 놓였는데 그때 도영님께서 올리신 글이 생각나서 다시 읽어봤어요. 그땐 그냥 재밌다, 신기하다 정도로 생각하고 넘겼는데 이번엔 그 방법을 저도 한번 써봐야겠다 싶어 하나씩 실천 중입니다' 같은 멘트를 주실 때가 있거든요.
05. 이처럼 그 순간에는 딱히 크게 와닿지 않았더라도, 아니면 꽤 인상 깊게 받아들여지는 임팩트가 있었다 할지라도 늘 우리를 실천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트리거(trigger)가 필요합니다. 의지가 매우 강한 사람이라면 스스로 이 트리거를 만들어 움직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게 사실이죠.
하지만 뭔가 변화가 필요하거나 눈앞에 맞닥뜨린 것을 해결해야 하는 순간에는 본능적으로 이 트리거가 만들어집니다. 그때 내가 고려할 수 있는 옵션이 많다면 그건 꽤 훌륭한 삶을 살고 있다는 반증이 되는 것이죠.
06. 그래서 저는 '세상에 이런 것도 있구나'라는 자세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책을 읽든 강의를 듣든 그 다음날부터 'OO 챌린지 1일차' 같은 목표를 세워 실천하는 것도 정말 대단한 거죠. 그러나 우리에겐 리소스도 한정적이고 (농담이 아니라) 진짜 마음의 준비를 하기까지 시간도 좀 필요한 게 사람의 본능이니까요. 우선은 뭔가를 꼭, 반드시, 지금 당장 실천한다는 강박은 잠시 접어두고 '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와 저렇게 해볼 수도 있구나'하는 관점을 유지하는 게 더 큰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07. 저는 이걸 '임시 저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냥 기억에서 지워버리거나 나랑 상관없는 일이겠거니 싶어 무관심하게 외면하는 대신 일단 나에게 트리거가 생기는 순간까지 임시로 저장해두기만 하는 거죠. 그러다 어느 순간 그 방법을 사용해야 하거나 그 관점을 빌려 써야 하는 순간이 오면 '오 그때 그런 게 있었는데'라며 임시 저장 폴더를 탐색하면 되는 겁니다. 저는 이게 요즘 시대의 정보 활용법인 것 같기도 합니다.
08. 최근 친한 기획자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좋은 기획자는 생각의 옵션이 다양한 기획자인 것 같다'라고요.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주제를 만나더라도,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드라마틱한 상황과 마주하더라도 내 나름대로 고려할 수 있는 생각의 옵션이 많은 사람이 좋은 기획을 펼쳐나갈 확률도 높기 때문입니다.
09. 그러니 '나는 맨날 써먹지도 않을 거 쌓아두는 것에만 욕심부리네'라고 스스로를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연복 셰프님의 비법을 전수받았다고 해서 내일부터 당장 탕수육 마스터를 목표로 살 수는 없는 거니까요. 대신 여러분 인생에서 하루 정도는 정말 맛있는 탕수육을 만들어야 하는 긴박한(?) 순간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때를 위해 그 기억과 감정을 잘 인덱싱 해놓으면 되는 거죠. 그럼 적어도 여러분의 손에 한 가지 옵션을 들려있는 거니까요. 바로 임시 저장된 폴더 안의 그 무엇인가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