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유행가 가사처럼 오늘날의 커리어 패스는 다음 정차역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구불구불한 곡선의 형태를 띤다. 길이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기대 수명이 80세를 넘어가면서 그야말로 60년간 일하는 시대가 됐다. 경력을 유지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외생적, 내생적 변수에 더 오래 노출되게 되는 셈이다. 비즈니스 환경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나고 이에 따라 새로운 기회도 발생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개인의 관심사나 욕구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여러 가지 변수로 인해 60년간 한 직장, 한 직무에 머무르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워졌고, 예전처럼 특정 나이대에 도달하고자 하는 경력 목표를 설정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 미국 스탠퍼드대 장수센터의 로라 카스텐슨은 “60년 내내 경력을 쌓는 동안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일하면서 속도 조절해야 한다“고 말했다. 커리어 사다리를 타고 수직 이동(승진)하는 ‘선형적 커리어 패스'에서 다른 직무로의 수평•대각선 이동을 포함한 ‘비선형적 커리어 패스'로 대세가 바뀌고 있다. 커리어 개발의 또 다른 기회이자 위협 요인으로 떠오른 챗GPT를 개발한 오픈AI의 샘 알트먼 역시 “선형적인 기회에 얽매이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워크트렌드인덱스에 따르면, 응답자의 46%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커리어 피봇(전환)’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커리어 피봇이란 직장을 옮기는 이직과는 다르다. 지금까지의 경험 가운데 일정 부분을 살려서 의도적으로 직업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팬데믹으로 인해 비대면 업무 환경이 늘어난 변화를 기회로 삼아 대면 세일즈에서 비대면 디지털 마케팅으로 직무를 전환하거나, 마케터로서 소비자 대상 인센티브를 설계했던 경험을 살려서 HR에서 구성원 대상 인센티브를 설계하는 일을 맡는 것을 커리어 피봇이라고 부를 수 있다. 피봇은 사전적으로 ‘축을 중심으로 방향을 회전시킨다'는 뜻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의도성’이다. 커리어 피보팅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나의 커리어에서 어떤 부분을 남기고, 어떤 부분은 변화시킬지를 결정하는 것이 핵심이다. 따라서 커리어 관리 역시 기존의 커리어 패스를 관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커리어 포트폴리오를 구축한다는 접근 방식을 따른다. 커리어 포트폴리오는 경영 사상가 찰스 핸디가 고안한 개념으로, 위험 분산을 위해 보유자산을 다각화한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다양한 일에 투자한다는 관점이 담겨 있다. 예를 들어, 벤처 투자자가 휴가 중에는 하이킹 가이드가 될 수 있고, 이 경험을 통해 프로젝트 관리와 팀 빌딩 방법을 익혀 스타트업 창업에 뛰어들 수도 있다. 이처럼 언뜻 보기엔 관련이 없어 보이는 각기 다른 경험이 결합하여 문제 해결력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이 커리어 포트폴리오를 통해 추구되는 가치다. 포트폴리오의 성격과 활용 방법은 커리어의 성장 단계에 따라 달라진다. 사회 초년생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여러 기술을 포트폴리오(skills portfolio)에 담는 것이 중요하다. 이후에는 경험을 선별하여 각각의 가치를 설명하는 ‘포트폴리오(results portfolio) 큐레이팅'이 중요해진다. 다양한 실무 경험을 통해 스킬 셋을 구축하고, 이 가운데 강점이 될 만한 스킬을 선별해 새로운 방식으로 섞는 방식이다. 커리어 막바지에는 일종의 유산으로서 후대에까지 선보일 수 있는 예술 작품 포트폴리오에 해당하는 ‘마스터 포트폴리오(master portfolio)’를 목표로 삼을 수 있다. 커리어 전환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기업들은 승진 외에도 수평•대각선으로의 커리어 기회를 체계적으로 제공해야 한다는 요구에 직면하고 있다. 조지 웨스터먼 미국 MIT 교수는 “회사가 직원들에게 경력 개발의 기회를 제공하려면 커리어 패스를 명확히 하고, 새로운 기술을 습득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존에 경영 승계 프로그램을 통해 일부 핵심 인재에게만 제공되던 경력 개발 기회를 모든 직원으로 확대해야 숙련된 구성원들이 다른 일자리를 찾아 이탈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구성원 또는 관리자에게만 경력 개발의 책임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조직 내에서 수직이 아닌 수평•대각선 이동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선 단순히 내부 채용 공고를 올리는 것 이상의 시스템이 필요하다. 수요자 중심으로 경력 개발 기회에 대한 정보의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통해 새로운 기회를 발견한 구성원에게 회사에 더 머물 이유를 제시할 수 있게 된다. 링크드인 데이터 분석 결과, 입사 후 3년 내 조직 내에서 수직•수평 이동 기회가 제공된 경우 조직에 머물 가능성이 각각 70%, 62%로 나타났다. 그렇지 않은 경우엔 45%에 불과했다. 구성원의 기술, 역량, 관심사에 따라 사내에 어떤 기회가 있는지 알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GE 디지털은 ‘커리어 디스커버리’란 온라인 툴에 구성원이 직접 자신의 역량과 관심사를 입력하도록 하고 있다. 이렇게 입력된 정보에 따라 적합한 다른 역할을 살펴볼 수 있고, 역할을 맡기 위해 요구되는 역량이 무엇인지, 역량을 키우기 위한 학습 기회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등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피츠버그대 메디컬센터는 ‘익스플로어 커리어‘라는 시스템을 도입해 구성원들이 자신의 역할을 맡았던 사람들은 다음 커리어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의 정보를 알 수 있도록 해당 역할을 맡은 사람에게 연락해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때 경험을 통해 학습할 수 있는 방법도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 단기 프로젝트에 참여하거나, 관심 있는 직무를 수행하는 다른 구성원을 근거리에서 관찰하는 ‘잡 섀도잉’이 직무 경험을 제공하는 예시다. 리더십 교육 기관 창조적 리더십센터(CCL)에 따르면 잡 섀도잉은 지식 전달 중심의 전통적 교육 훈련의 효과보다 직무 경험의 효과가 9배 더 크다.

60년 커리어 패스가 일직선일 수 없다

한국경제

60년 커리어 패스가 일직선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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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25일 오후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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