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의 예언자가 되는 때가 있다’라는 문장을 종종 떠올린다. 김영하 작가의 2009년 에세이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에서 읽은 문장인데 다시 확인해 보니 원문은 나의 기억과 조금 달랐다.


‘우리 인생의 어떤 순간에는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자기 운명에 대한 예언이 된다’고 되어 있다(김영하 작가는 내용을 보태고 제목을 바꿔 2020년 <오래 준비해온 대답>이라는 책으로 다시 출간했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두 가지 점에서 놀랐다. 필자도 이런 적이 있어서 그랬고, 그 마음을 어쩜 이렇게 적확하게 표현했나 싶어서 감탄했다.


30년쯤 전의 얘기다. 새해 첫 출근 날 커피를 마시며 팀 회의를 할 때였다. 덕담이 오갔고 새해 계획을 묻는 질문이 이어졌다. 다들 소박하거나 야심 찬 계획 한두 가지씩을 말했다. 필자 차례가 되었는데 입에서 느닷없이 이런 말이 나왔다.


“저는 올해 히말라야에 가겠습니다.” 팀 사람들 모두가 “뭐라고? 어딜 가? 히말라야? 계획 한번 거창하네”하며 놀랐고 웃었다. 정말로 놀란 건 필자였다. ‘아니, 내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어디를 간다고?’ 당황스러운 이야기를 하고는 겸연쩍게 웃었던 것 같다.


그 말을 뱉기 전에는 단 한 번도 그곳에 가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히말라야가 설악산도 아니고 거기를 어떻게 간단 말인가? 그러고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8년 차 사원으로 여느 해처럼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그해 가을, 결국에는 히말라야를 갔다.


그해 봄을 지나면서부터 몸이 많이 아팠다. 몸과 마음은 확실히 이어져 있는 것인지 몸이 아프자 마음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아니 마음이 힘들어지자 몸에 병이 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병원에서 여러 검사를 해도 별문제 없다는데 도무지 낫질 않아 한의원을 찾았다.


진맥을 하던 한의사 선생님이 혀를 끌끌 차며 이랬다. “아니 젊은 처자 가슴에 무슨 화가 이리 많이 고였누. 힘든 일이 많아요?” 그 말을 들으며 눈물을 쏟았다. 지금 와서 돌아보니 번아웃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그런 개념조차 없을 때였다.


가을로 접어들자 웬만큼 몸은 추슬렀는데 마음이 문제였다. 도무지 일할 의욕이 생기질 않았다. 30년 전이니 대리급 사원이 감히 휴직 얘기를 꺼낼 계제가 아니었지만 윗분들은 의논 끝에 내게 휴식할 시간을 주셨다.


왠지 길은 길에서 찾아질 것 같은 느낌이 있었던 나는 정말로 길을 나섰다. 팀장님께서는 휴양지를 찾아 쉬다 오라 했지만 젊었던 나는 휴양지엔 영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 대신 두 달간 인도로 가는 ‘장도’에 올랐다. 갓 서른의 젊은 여자에겐 정말로 장도였다.


인도의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갠지스강과 바라나시를 거쳐 히말라야 품으로 들어갔다. 카트만두를 거쳐 포카라로 가서 마차푸차레봉도 원 없이 봤고 며칠간 트레킹도 했다. 고산증을 겪을 만큼 높이 오르진 않았지만 눈을 들면 사방이 설산이라 내겐 히말라야 품에 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해 초 나도 모르게 나의 입에서 나와 버린 말이 실제가 된 것이다. 그때 나는 정말로 내 인생의 예언자였고 그렇게 떠난 길에서 새로운 눈을 얻어 이전과는 달리 세상을 보며 내 앞의 생을 살았다.


그 후 가끔 생각한다. 자기 인생의 예언자가 된다는 건 무엇일까? 언어에는 힘이 있으므로 자꾸 말하면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나게 된다는 뜻일까?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안에서 뭔가 벌어지고 있는데 의식은 아직 그것을 구체적인 언어로 잡아내지 못했지만, 예민한 센서 하나가 그걸 감지해 자꾸 신호를 보내는 상태가 아닐까? 헌데, 소음은 바깥세상에만 있는 게 아니고 내 안에도 가득 차 있으므로, 센서를 잘 가다듬지 않으면 그 신호를 알아차리기 어렵다.


송길영 작가는 개인의 시대를 넘어 ‘핵개인의 시대’를 말하고 핵개인들은 누구나 자기답게 살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자기답게 산다는 건 무엇일까? 여러 소음 가운데 자기 안에서 보내는 신호를 알아차리고, 세상에 해를 끼치는 게 아닌 한 그 신호를 따르는 게 아닐까?


세계적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먼 북소리’를 듣고 자신의 길을 새로이 열었듯이 말이다. 그러니 이 세밑에 다시 묻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또 나는 ‘먼 북소리’를 듣고 있는지를. 또 자기 인생의 예언자가 되고 있는지를. 한 해를 돌아볼 때 빼놓지 말고 물어야 할 질문 같다.

[동아광장/최인아]자기 인생의 예언자가 될 때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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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23일 오후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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