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문제 앞에서 반응하기와 대응하기
정신의학신문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많은 고난과 역경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시련은 나의 행위나 잘못된 선택에 따른 결과로 겸허하게 그 책임을 통감하고 받아들이지만, 또 어떤 역경은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의 선택이나 행위와는 상관이 없는, 뜻하지 않은 시련이 찾아오기도 하죠.
가령 열심히 준비한 공개 입찰에서 경쟁사 분석에 오류가 있어 떨어졌다면 쓰라린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로 인해 어느 날 갑자기 건강이나 재산을 크게 잃게 된다면, 그 현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이처럼 우리가 겪게 되는 어려움이 크든 작든 인생이라는 여정을 건너다 보면 누구나 수많은 난관 앞에 봉착하게 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적군이 공격해 오는 상황을 맞닥뜨리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투쟁-도피 반응 (fight or flight response)’ 태세를 갖추어 맞서 싸우거나 빠르게 도망가는 반응을 보입니다.
이는 긴급하거나 위협적인 상황에서 우리의 교감신경계가 즉시 작동해 빠른 방어 행동을 보이기 위해 생리적 각성 상태를 높이며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적과 맞서 싸우거나 도망가는 행동으로 즉각적인 위협에 반응하는 것이죠.
이때 우리 신체는 면역 체계와 호르몬계, 소화 계통이나 심혈관계통 등에 각성이 생기며, 심리적으로는 두려움이나 불안감, 위축감 등이 활성화됩니다. 이처럼 인간은 갑작스러운 공격이나 위협이 가해지는 상황에서 신체는 물론 심리적으로도 취약해집니다.
오늘날 전쟁이나 맹수가 위협해 오는 상황이 아니라면, 인간이 즉각적인 생존의 위협에 놓이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선조 때부터 진화되어 온 ‘반응적인 뇌’는 직접적인 위협이나 공격이 없더라도 문제가 발생했다거나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신호를 감지하면 ‘반응성 모드(reactive mode)’로 돌입합니다.
이를테면 신체적 공격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나를 비난하거나 공격하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반응성 모드로 진입하여 상대에 맞서 공격하거나 그 자리를 회피하려는 반응을 보이기 쉽습니다. 이런 반응은 미처 어떠한 생각이나 대응을 할 겨를도 없이 빠르게 이루어지므로, 현명한 대처보다는 나중에 후회할 일을 만들거나 실수로 이어질 확률도 높습니다.
앞서 공개 입찰에서 경쟁사 분석에 오류가 있어 떨어진 상황을 통해 ‘반응’과 ‘대응’의 차이를 살펴 보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실망한 상사는 실무자를 질책하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실무자들 역시 사전에 입찰 준비 과정에는 별다른 조언이나 도움을 주지 않았으면서, 결과만 갖고 나무라는 상사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평소에 반응하기보다는 ‘대응’하는 태도를 가진 상사라면, 비록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 입찰 준비를 열심히 했던 실무자를 먼저 격려한 후, 다음 번에는 어떻게 하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지 이번 사례 분석을 통해 대응책을 모색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거나 소통을 할 때도, 단순히 즉각적 반응하는 것과 잠시 멈춰 대응하기로 선택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리다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퇴근한 남편과 마찬가지로 어린 자녀의 육아로 지친 아내가 저녁 식사 자리에 앉았습니다. 부부는 각자 너무 피곤한 하루를 보낸 나머지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죠.
이때 아이가 식사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장난을 치기 시작합니다. 남편은 성난 얼굴과 고압적인 목소리로 아이에게 가만히 앉아서 식사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아내에게 그 화살을 돌립니다. 자녀 교육을 어떻게 시키기에 아이가 식사 예절도 못 배웠느냐는 것이죠.
그러자 아내는 남편에게 반격합니다. 평소 육아에는 참여하지도 않으면서 이럴 때만 자기 탓을 한다면서 말이죠. 즐거워야 할 식사 자리에 서로에 대한 비난과 날카로운 말들만 난무합니다. 아이는 험악한 식사 자리가 무섭기만 하고요. 결국 남편은 식사를 다 마치기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납니다.
남편이나 아내나 모두 이 상황에서 서로에게 감정적으로 반응하기만 할 뿐, 어떻게 하면 더 잘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한 대응은 빠져 있습니다. 어떻게 대응했다면 모두에게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상황이 정리 되었을까요?
남편은 아이의 행동에 감정적으로 화가 났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바로 반응하지 말고 차분히 감정을 가라앉히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런 후 아이에게 식사 예절을 잘 설명해주고 일단은 즐겁고 평화롭게 식사를 마치는 데 중점을 둬야 합니다. 그리고 적절한 때 아내와 함께 어떻게 하면 아이에게 올바른 식사 예절을 교육할 수 있을지 상의해야겠죠.
이처럼 인생의 중대한 문제나 큰 역경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크고 작은 문제나 갈등 상황에서도 ‘반응하기’와 ‘대응하기’ 중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생겨나기도 합니다.
즉, 반응하는 것이 더 본능적이면서 어떤 상황에 대한 주도권을 상대방이나 그 상황에 내맡기는 수동적인 태도라면, 대응하는 것은 더 이성적이면서 주도권을 나에게로 가져오는 능동적인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상황이나 순간에서 ‘반응’하는 것보다 ‘대응’하는 것이 반드시 이롭다거나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반응’과 ‘대응’의 틈, 한 템포 깊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그 사이를 잘 활용한다면, 하염없이 흘러가는 강물의 방향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금은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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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25일 오후 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