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이 닿지 않는 바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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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와 혁신은 어떤 몸에서 나오는지, 궁금하신가요?’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라는 문제를 풀어 성과를 극대화하고 큰 성취를 이루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성장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라면 ‘해킹’이란 개념과 깊게 공감하고 계실텐데요, 원하는 성취 분야의 메커니즘을 세세하게 파악하고 역설계(reverse engineering)해서 똑같이 따라할 수 있는 경지가 된 다음, 이젠 성취를 공장처럼 찍어내고자 하는 방식의 접근이죠. 증기기관의 발명 이래 우리 현대인은 ‘성장을 찍어내려고 하는’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우리는 주변 환경을 통제하고 세세한 요소를 재배열해서 원하는 결과를 계속해서 뽑아내길 원합니다. 혁신의 비밀은 무엇일까? 혁신 잘하는 사람의 특징은 무엇이고, 성장하는 사람의 습관은 무엇이고, 잘나가는 팀의 방법론이 무엇인지 연구해서 우리도 똑같이 따라해보는 거죠. 수많은 경영경제와 자기계발 서적이 위와 같은, ‘해킹’의 접근법을 취합니다. 몰입도 혁신도 창조도 ‘내가 하는 것’이라는 편향이 깃들어 있는 것이죠.
그런데 저는 제 성장여정에서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몰입도 혁신도 창조도 성장도 ‘내가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버릴 때, 오히려 잘 되는 지점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이죠. 제가 소셜미디어나 플랫폼에 썼던 글 중에 가장 반응이 좋았던 것들은 ‘기획을 전혀 하지 않은 글’이었습니다. 오랜시간 고민하고 기획한 글이 나쁘거나 모두 실패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예상 외의 반응과 공감을 이끌어내 자신감을 안겨준 글은 거의 항상, ‘아무 생각 없이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글이었어요.
아이디어는 어떤가요. 기획을 위해 쥐어짜낸 아이디어가 ‘혁신적’인 경우가 없다고 말할수는 없을 겁니다. 어쨋든 기획자는 자신뿐만이 아닌 팀을 위해 기획을 하는 것이 맞으니까요. 그러나 성취의 압박보다는 좋은 팀이 주는 안정적인 심리적 환경 속에서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what if)?’와 같은 방식으로 뽑아낸 아이디어가 더 좋은 결과를 얻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의도적인 계획이나 전략적인 접근, 기획이 무겁게 들어간 방식의 혁신과 창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팀으로 함께 일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계획성은 반드시 필요하죠. 그렇지만 우리가 날씨를 통제할 수 없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성장의 흐름을 내 힘만으로 완전히 통제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조류를 읽고, 파도를 타며, 통제할 수 있는 요소를 통제해야겠죠. 주변을 살펴보면 우리의 환경은 빠르게 변하고 있고, 누군가는 무엇을 불편해하고 있으며,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머리 속과 내 협소한 관점을 벗어나 마음을 조금 열어본다면 말이죠.
조금 지나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몰입은 내가 하는게 아니에요! 몰입이 나를 하는 겁니다!’
내가 몰입하기 좋은 환경을 해킹해 완벽하게 조성해주더라도 마음의 불이 붙지 않을수 있습니다. 좋은 공간, 좋은 팀, 의미있는 일, 숙달된 직무, 심리스한 소프트웨어, 완벽한 하드웨어, 유용한 정보를 모두 가지고 있더라도 ‘그냥 느낌이 안 올 때’가 있을 수 있죠. 날씨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것처럼, ‘마음의 날씨’도 완벽히 통제하긴 어려우니까요. 물론 제가 아직 미숙해서 그럴수도 있습니다.
몰입이 나를 하는 겁니다. 어떤 작가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거대한 산사태가 일어나는 것처럼, ‘생각을 다운로드한다’고 말합니다. 아이디어의 신이 있다면, 그는 비슷한 생각을 1,000명에게 동시에 심어주는 것 같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전혀 연관이 없는 사람들이 유사한 아이디어를 제시한 사례는 역사적으로 꽤 많죠. 경험적으로도 제가 ‘이거 재미있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다고 실행하지 않은 것들을 보면, 나중에 누가 이미 했거나 시도하고 있더군요. 아이디어의 신은 천명에게 혁신의 불꽃을 내린 후에 ‘누가 실행하나 한번 지켜보지! 으하하’라고 말하며 팔짱을 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내린 아이디어를 메모하고 받아적어서 실행하는 사람들을 흐뭇하게 지켜보면서 말이죠.
글쓰기로 말해볼까요. 내가 아니라 공간이 글을 씁니다. 멋진 카페나 사무실에서는 글이 술술 써지죠. 바다를 바라보는 카페에선 누구나 시인이나 문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아니라 디바이스가 글을 씁니다. 나에게 꼭 맞는 노트북이나 멋진 노트는 상상력과 창조성을 자극하죠. 독자가 글을 씁니다. 내 글을 아껴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용기를 내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됩니다. 독자가 어떤 생각을 할지 상상하며 티키타카하며 글을 써나가는 재미가 있죠.
이런 생각을 이어나가면, 재미있는 가설들이 나옵니다. 혁신은 고객이 하는겁니다. 창조는 오디언스가 하는 것이고요. 멋진 피아노 연주는 연주자가 한 것이 아니라 작품을 관람한 내가 한 겁니다. 멋진 고전과 작품은 작가가 쓴 것이 아니라 내가 쓴 것이죠. 맥북과 아이폰은 스티브 잡스가 만든 것이 아니라 고객인 내가 만든 것이죠.
나라는 인간을 내 마음 속에 있는 ‘에고(ego)’가 아니라 유기체, 무기체, 디지털이 재배열된 ‘사이보그 네트워크’로 상상해보면 더 재미있는 생각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쓴 글이 이 몸뚱이 속에 있는 뉴런의 네트워크에서 창발한 어떤 협소한 정신체가 쓴 것이 아니라 [육체-정신-디바이스-공간-플랫폼-독자]의 네트워크가 쓴 것이라고 생각해보는 것이죠. 내가 산을 오른 것이 아니라, 산이 ‘우리’를 부른 것이죠.
‘몰입이 나를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나에게 주어진 환경을 조금 다르게 볼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문제가 아니라 기회로, 저주가 아닌 축복으로, 불행이 아닌 행복으로요. 나는 지나치게 환경을 통제하고 내 불안감이나 성취욕에 빠져서 ‘알아서 되려는 일’을 방해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죠. 조류가 만들어지고 파도가 치고 있다면, 서핑을 하러 나가면 될 일이죠.
몰입하며 일하고 계신가요? 흐름을 타며 살아가고 계신가요? 흐름과 너무 멀어져서 길을 잃은 상태라도 괜찮아요. 파도는 다시 칠 것이고 흐름은 다시 올 테니까요. 다만 노 들어올 때 파도 저을 준비는 해두면 좋겠죠. 오늘은 약간은 힘을 빼보는 하루 되시면 좋겠습니다. 이 글에 공감하셨다면 당신의 몰입 경험을 나눠주셔도 좋겠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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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17일 오전 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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