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행지에서 그곳에 사는 주민을 만났다. 그는 나를 부러움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여유롭게 여행도 다니고 좋겠어요.” 반대로 나는 그를 부러워했다. “이렇게 근사한 곳에 산다니 좋겠어요.” 내가 부러워했던 삶의 주체가 나를 부러워한다는 건 아이러니한 현실이었다.


우리는 가질 수 없는 것을 아쉬워한다. 그러나 나에게도 남이 가지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 이룰 필요가 없는 목표에 애쓰기보다는 이룰 가능성이 있는 목표에 힘을 싣는 것, 그것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방어기제를 극복하려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이 말은 감정대로 행동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본심을 숨기려 할수록 통제가 어려워지고 본능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다시 말해, 감정을 인정해야 행동까지 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감정은 실체를 들키면 꼬리를 내리기 때문이다.


타인을 위해 내 마음을 누르는 건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없다. 타인의 행복을 바라보는 것이 내가 경험하는 행복만큼 클 수 없기 때문이다. 나를 갈아서 타인을 위하는 건 건강한 삶이 아니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리고 그 수단이 다시 나를 힘겹게 하니 결국은 플러스마이너스 제로다.


헌신이 습관이 되면 만족감은 떨어진다. 저울질이 시작되고 억울해진다. ‘나는 이만큼 희생하는데 걔는 왜 받기만 할까? 내가 해주듯이 알아서 해주면 안 되나?’ 돌아오지 않는 보상에 괴로움이 커진다. 결국은 상대와의 관계도 나빠지고 자신의 마음을 지키지도 못한다. 나를 위해 살지 못하는 사람은 남을 위해서도 살 수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다.


보라색을 칠하는 아이가 있다. 보통은 이렇게 칭찬한다. “보라색 너무 예쁘다!” 이제 아이는 매일 보라색으로만 그림을 그린다. ‘보라색=예쁘다’라는 모범답안이 생겼기 때문에 다른 답을 선택하지 못한다. 만약 “보라색을 칠했네?” 하고 만다면 어떨까? 아이는 관심만 받을 뿐 정해진 정답에 갇히지 않는다. 이제 다른 색도 집을 수 있게 된다. 그때 또 관심을 주면 된다.


“이번엔 노란색으로 칠했구나!” 어떤 행동을 해야 관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해도 관심을 받는다는 걸 느낄 때, 선택의 결과가 아닌 ‘나’의 선택이 존중받는다고 느낀다. 그 마음은 나라는 존재 자체가 소중하다는 믿음을 심어준다. 조건 없는 인정의 시작은 존재 자체를 읽어주는 것이다. 관심을 주되 판단은 배제하는 것.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행복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모두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 문제는 때때로 우리의 행복을 남에게 맡긴다는 데 있다. ‘좋은 일이 생겼으면…’ ‘좋은 사람이 나타났으면…’ 하고 말이다. 이는 즐거운 일이 일어나지 않고,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행복을 어떻게 찾아야 할까? 행복의 주체가 ‘나’여야 한다. 내가 고민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선택한 행동으로 행복해야 한다. 그리고 행복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


내가 왜 불안한지, 왜 두려운지, 왜 화가 나는지 등등 자신의 감정에 담긴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면 그 안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인다. 자신도 미처 몰랐던 스스로의 모습을 마주하고, 바라보고, 보듬어줄 수 있을 때만이 비로소 우리는 한 뼘 자란 ‘나’와 조우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모습에 100%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 당장 내다버리고 싶은 모습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타인을 나를 정의하지 못한다.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것은 나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이유다. 내가 나의 마음을 정확히 이해할 때만이 우리는 ‘남’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가면을 쓰고 산다면? 상처받는 게 두려워서 도전조차 하지 않는다면? 나 하나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삶의 매 순간이 도장 깨기 같다고 느껴진다면? 타인의 평가를 최우선에 두고 살고 있다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살 만한가, 죽지 못해 버티고 있는가. 사람들은 궁지에 몰리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떨어져 죽을 때까지 버티거나 새로운 길을 찾거나. 떨어져 죽는 것보단 새로운 길을 밟는 게 낫다. 그러나 딱 1도만큼 방향을 틀 용기도 우리에겐 부족하다.


그때 내가 나를 믿어준다면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하는지 자연히 알게 된다. 딱 한 걸음만 발을 떼면 마음가짐이 달라지고, 마음가짐은 자신감이 되어 행동에 힘을 실어준다. 그렇게 기대는 현실에 가까워진다.


“잘하고 싶고, 잘 살고 싶은데 내 발걸음은 왜 이렇게 엉망진창일까?” 누구나 한번쯤 떠올렸을 생각이다. 사랑받고 싶고 존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무엇 하나 신통치 않고, 나만 빼고 모두들 저만치 앞서가는 것 같아 무기력해진다.


‘나는 안되는 사람인가?’ 불안은 우울로, 상처로, 단념으로 이어진다. 인생은 마음으로 걷는 여정이다. 스스로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분명히 다르다. 당장 완벽하진 않더라도 3년 후의 나, 5년 후의 나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다.


인생을 후회 없이 사는 사람은 행복이 찾아오길 기다리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언제 미소 짓는지, 누구와 함께 있고 싶은지, 어떤 일에 뿌듯한지를 알고 그 순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상처받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를 할퀴던 채찍을 내려놓는 것이다. 우리는 잘 맞설 수 있고 잘 견딜 수 있고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다. 이제 스스로를 상처 입히던 채찍을 내려놓고, 나에게 친절한 응원을 건네보자. 어제보다 나은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잘하고 싶어서 자꾸만 애썼던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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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18일 오전 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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