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그거 자존감 문제 아니야》

일상에서 흔히 쓰이던 ‘자존감’이라는 용어는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제임스가 1890년대에 처음 심리학 영역으로 끌어들여 사용하기 시작한 개념입니다. 당시에 그는 자존감을 ‘성취 수준을 개인의 목표치로 나눈’ 비율 공식으로 정의했습니다. 이를 수식화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존감 = 성취 수준 ➗ 야망 성취도 높고 야망도 높으면 가장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야망이 적절한 수준이라면 사실 자존감이 낮아질 일은 없습니다. 윌리엄 제임스 역시 높은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공의 수준을 높이거나 자신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를 거쳐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자기를 희생해가며 사회에 기여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을 더 강조하는 트렌드가 형성되었고, 아이들의 낮은 자존감은 추후 학업 실패로 이어질 것이라는 섣부른 예측마저 생겨나 개인의 자존감에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개인의 현실적인 상황이라든지, 실은 적절한 수준이었던 원래의 야망은 무시한 채로 더, 더, 더 높은 자존감을 가져야 한다고, 그것이 멋진 사람, 건강한 사람, 성공한 사람의 특성이라고 선전하는 메시지가 만연해졌습니다. 윌리엄 제임스의 저 멋진 통찰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엉뚱하게도 자존감을 높이려면 성취를 해내야 하며, 그 성취를 위해선 더 큰 야망을 가져야 한다는 잘못된 메시지가 대량 생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특히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인생의 성공을 설파하는 자기 계발서 작가들의 ‘선무당식’ 진단이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개인의 저조한 성취, 대인관계 문제, 심지어는 살면서 부딪치게 되는 갖가지 심리적인 문제들이 모두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한다는 이론을 폭발적으로 퍼뜨리며 개인의 책임을 끝없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더 노력하지 않은 탓은 아닌가요?’ ‘당신은 얼마나 치열하게 살고 있나요?’ ‘너, 그거 자존감 문제야.’ 이제 평범한 사람들 모두가 자존감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적인 흐름이었고, 심지어는 서너 살짜리 유아들의 자존감을 측정한다는 검사지까지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한국에서도 IMF로 마지막 낭만의 시대가 끝난 2000년대 무렵부터, 성취와 실패를 개인의 자질 문제로 돌리며 그 사람의 자존감 문제를 추궁하는 분위기가 무한대로 확산되었습니다. 한편으로 개개인은 낮은 자존감을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 점점 더 많은 노력을 해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절대적으로 높거나 절대적으로 낮은 자존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저는 강의 시간에, 높은 자존감이란 ‘착한 지도교수’나 ‘부모의 손이 필요 없는 아이’처럼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신화 속 동물인 유니콘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허상입니다. 시중에 범람하는 자기 계발서들이 말하는 자존감의 경지는 ‘굳이 이렇게까지?’ 싶은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의 자존감이 그 수준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높은 자존감이라는 프레임은 분명 허상에 불과하지만, 이 신기루가 우리의 자존감을 낮추는 경우를 너무 자주 보아왔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일관되게 높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을 알고 있나요?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그럼 자존감이 낮은 사람을 알고 있나요? 음, 이게 우리지요.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입니다. 물론 자존감이 ‘높아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 역시 매일매일 위아래로 끊임없이 요동치는 자존감을 끌어안고 살아갑니다. 아무리 자존감이 높아 보이는 사람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어떤 날은 스스로가 괜찮아 보이고(아마 당신은 하필이면 이런 때에 그를 만났겠지요), 어떤 날은 기분이 바닥 끝까지 가라앉는 경험을 하면서 그저 버티며, 수습하며, 꾸준히 살아갈 뿐입니다. [ 큐레이터의 문장 🎒 ] 세상은 높은 자존감의 장점을 소리 높여 외치지만, 높은 자존감과 낮은 자존감은 제각기 장단점이 있습니다. 높은 자존감을 갖고 있다고 스스로 보고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의 질이 유난히 높은 것도 아니고, 대인관계를 특별히 오래 유지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보여 고립되거나, 본인이 세상을 통제하는 능력이 높다고 자신하기 때문에 건강에 해로운 행동을 남들보다 일찍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죠. 반면 낮은 자존감을 지닌 사람들은 세상의 변화와 피드백에 예민하고 항상 남들 눈에 비치는 모습을 신경 쓰기 때문에 실수가 적은 편입니다. 또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 자신의 성취를 위해서건 성격적 성숙을 위해서건 간에 부단히 또 부산하게 노력합니다. 자존감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자존감 문제면 또 어때서요. 그게 어때서요? 그래서 최근에는 상태 자존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 말은 삶의 맥락과 고비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자기 가치감을 뜻합니다. 또한 이 말은 우리 모두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하는 유동적인 자존감을 끌어안고 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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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5일 오전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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