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상용하고 있는 말이 어원의 의미를 그대로 담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단어의 용도가 어원에서 여러 갈래로 분화하는 과정에서 원래 뜻이 희미해진 경우도 많다. 영어의 ‘익스프레스’는 후자의 대표적인 예다. 이 말은 ‘표현하다’라는 의미로 많이 쓰지만, 말의 구성(ex-press)을 보면 원래 ‘짜내다’(press out)라는 뜻이다. 물리적인 동작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정신 활동도 가리킨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 상상, 구상을 밖으로 짜내 말, 글, 그림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표현해내면 전달하려는 것이 명확해진다. 그래서 ‘명시된’, ‘분명한 의도를 지닌’ 등의 뜻도 획득하게 되었다. 원하는 바나 목적을 명확하게 하다 보니 ‘특정 목적의’, ‘전용’, ‘전담’이라는 뜻으로도 가지치기했다. 목적지에 분명히 전달되기 위한 ‘전담 우편’ 제도가 생겼는데, 이 경우 분실 위험도 적고 빠르기 때문에 ‘속달 우편’(express mail)이란 의미도 획득했다. 이는 기차에도 적용되었다. 웬만한 역은 지나치고 정해진 목적지까지 빨리 달리는 ‘전용 열차’ ‘급행열차’를 익스프레스라고 한다. 이것은 같은 라틴어 뿌리에서 나온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의 활용에서도 나타난다. 이탈리아에서는 커피 이름으로까지 확산되었다. 그곳의 대표적인 커피 에스프레소(espresso)에는 묘하게도 그 말이 분화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거의 모든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우선 기계로 ‘짜내기’ 때문이고, ‘신속하게’ 만들어내기 때문이며, 매번 고객 각자의 주문에 응하는 ‘전담’ 서비스 정신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즉 에스프레소는 ‘당신을 위해 신속히 짜낸 커피’가 된다. 어젠다(agenda)의 어원을 강조하기 위해 좀 우회했다. 어젠다의 경우는 어원의 의미가 현재 상용하는 말에서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지나치는 언어 사례다. 우리말로 의제(議題)라고 옮기지만, 이는 그 말의 본질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의제는 우리말 사전의 뜻대로 ‘회의에서 의논할 문제’인데, 이는 매우 제한적인 의미다. 번역어가 원어의 ‘뿌리 뜻’을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젠다는 라틴어 동사 아게레(agere)에서 유래한다. 아게레는 ‘행하다’라는 뜻이다. 곧 실행하고 실천에 옮긴다는 뜻이다. 이는 그와 같은 뿌리에서 나온 단어들(act, action, actual)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어젠다는 원래 ‘크레덴다’(credenda), 즉 ‘믿어야 할 일들’이라는 말에 대응해서 ‘실천해야 할 일들’이란 신학적 용어로 사용되다가 정치, 경제 등 다른 영역으로 전용되었다. 그러므로 어젠다는 실행이 본질이다. 실행하지 않을 어젠다는 아무 의미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젠다를 계획이나 회의 목록 정도로 인식하는 데 거기 머물면 본래 의미를 손상하게 된다. 기업 간 비즈니스에서든 국제간 협상에서든 실행을 강조하려고 어젠다라는 명칭을 쓴다. 예를 들어 2001년 다자간 무역 협상으로 출범한 ‘도하 개발 어젠다’는 원래 ‘도하 라운드’였으나 명칭이 바뀌었다. 개발도상국들이 경제개발의 구체적인 실천에 방점을 찍기 위해 변경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어젠다는 그 말을 제시할 때마다 그 어원을 상기할 필요가 있는 말이다. 의제로서 어젠다도 이중적으로 실행의 의미를 갖는다. 우선 회의에서 일정 과제가 반드시 다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고, 제기된 과제가 실행에 옮겨질 수 있도록 논의를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도 그렇다. 즉 ‘목표지향적 논의’를 해야 한다. 또 토론에 그치지 않는 세부적인 ‘논의의 기술’이 필요하다. 어젠다가 실행되려면 당연히 여러 조건이 필요하다. 그 가운데서도 꼭 필요한 것이 ‘피저빌리티’(feasibility)다. 우리말로 타당성이라고 번역하는데, 이 경우도 그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사전에서는 타당성을 ‘사물의 이치에 맞는 옳은 성질’이라고 정의하는데, 어렵다. 본질적인 뜻대로 ‘실현가능성’이라고 하는 게 더 좋을 것이다. ‘해낼 수 있는가’를 따져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 말의 뿌리는 라틴어 파케레(facere)인데, 영어 ‘하다’(do)에 해당하는 동사다. 이 말은 어젠다의 요건으로서 어원에서부터 어젠다의 의미와 잘 통한다. 아무리 근사한 어젠다라고 해도 실현가능성이 낮으면 소용없다. 개인의 일에서부터 국가 정책에 이르기까지 실현가능성은 모든 목표 설정에서 중요하다. 필자 개인적으로도 실현가능성을 소홀히 다루었다가 고생한 적이 있다. 오래 전 이야기인데, 학위 논문을 쓸 때는 논문 계획서를 공식적으로 제출한다. 계획서에는 논문 주제와 그 독창성, 학술적 공헌도, 연구의 범위 등 여러 항목이 있는데, 마지막에 반드시 실현가능성을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논문 지도 교수님은 “박사 논문을 3년 이내에 마치는 것도, 5년 이상 걸리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며, 실현가능한 계획을 계속 요구했다. 내가 세운 계획으로는 5년을 훌쩍 넘길 것 같고 어쩌면 못 마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계획서를 몇번 퇴짜 놓고 나서야 지도를 승낙하셨다. 의욕이 실천은 아닌 것이다. 실현가능성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새해의 첫머리는 ‘어젠다의 계절’이다. 다보스 포럼으로 잘 알려진 세계경제포럼은 통상 매년 1월에 연례 회의를 한다. 올해도 16~20일에 회의가 열렸다. 포럼은 “글로벌, 지역 및 산업 어젠다를 형성하기 위함”이 자기들의 ‘사명’임을 공식 사이트에 밝히고 있다. 어젠다를 직접 만들어내고 실천하지는 않지만 ‘어젠다 설정’에 관여하고 영향을 주겠다는 뜻이다. 이런 포럼은 중립적임을 내세우지만 여러 이해관계가 스며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의 제언은 ‘비판적으로’ 참고하고 수용해야 한다. 비판의 개념은 18세기 칸트가 비판철학을 정립하며 여러 분야에 영향을 주었는데, ‘적용의 한계를 살피다’라는 뜻을 내포한다. 이는 어젠다의 개념과도 연관되는데, 실제 적용의 한계를 면밀히 살피는 일이 실현가능성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김용석의 언어탐방] 어젠다: 실행이 본질이다

Hani

[김용석의 언어탐방] 어젠다: 실행이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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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2일 오후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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