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미(吟味)'한 다음 '의미 부여'를 해도 전혀 늦지 않습니다.

01 . 기획자로 일하며 생긴 버릇이 있다면 아마도 '반응에 대한 크로스체크'가 아닐까 싶습니다. 즉 내가 경험한 콘텐츠를 다른 사람은 어떻게 보고 평가했을까 하는 데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거죠. 그래서 '남이 뭐라든 나 좋으면 됐지 뭐'라는 생각보다는 '대체 남은 어느 포인트에서 마음이 동했고, 또 그렇지 않았는가'를 나름의 관점으로 분석하는 습관이 직업병처럼 따라붙어 다닙니다.


02 . 그래서 한때는 타인의 평가를 찾아 탐닉(?) 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누군가가 리뷰라는 이름으로 생성해놓은 콘텐츠라고 하면 일단 보고, 읽고, 이해하려 했던 것 같아요. 어쩔 때는 리뷰를 먼저 보고 타인의 관점에 잔뜩 기댄 채로 그 대상을 마주하는 일도 많았죠. 주객이 전도된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었지만 그때는 또 그게 콘텐츠를 즐기는 새로운 방법이자 묘미였던 것 같기도 합니다.

다만 그런 생각이 아주 오래가지 못했다는 게 문제였죠.


03 . 고약한 버릇이 생긴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당시는 남들의 리뷰를 즐기는 만큼이나 저 역시 영화나 책을 보고 리뷰하는 것을 즐겼던 때였는데요, 그러다 보니 왠지 누군가에게 내 의견을 소개할 목적으로 콘텐츠를 보기 시작하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겁니다. 콘텐츠 자체를 온전하게 감상하고 즐기기 보다 어떤 포인트를 어떻게 소개할지, 어떤 흐름과 컨셉으로 소개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는 게 우선순위가 된 것이죠.


04 . 더 최악은 과한 의미 부여에 있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성급한 의미 부여의 오류(?)'라고 불러야 할 것도 같네요. 그 대상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은 너무너무 중요한 일이지만 일단 그에 앞서 그것이 나에게 어떤 느낌을 주었는지를 오롯하게 감상해 보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첫인상이라고 부르는 임팩트, 본능적으로 인지되는 호불호, 오감으로 마주하는 섬세한 감정들을 먼저 맛보고 난 다음 천천히 의미를 고민해도 전혀 늦지 않다는 것이죠.


05 . 넷플릭스에서 화제가 되었던 다큐멘터리 ⟪도시인처럼⟫에 등장하는 주인공 프랜 리보위츠는 시니컬하고 직설적인 작가로 유명합니다. 그런 그녀가 날린 촌철살인 어록이 하나 있죠.

"평론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살아가는 사람들 대다수는 자기가 우월하다는 자만심에 사로잡혀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그들만큼 열등한 존재도 없죠. 그들은 남들이 웃는 포인트에서 슬픈 뒷이야기를 짜내야 하고, 남들이 슬퍼하는 포인트에서 새 희망을 본 듯한 표정을 지어야 하거든요. 그들 입에 소금을 한 움큼 처넣어보세요. '오. 짠맛 뒤에 따르는 이 싱거움이여'라고 말할 테니까요. 세상에 그런 바보 같은 인생도 없습니다."


06 . 저도 압니다. 그녀가 비약의 비약으로 평론가들을 풍자했다는 사실을요.

하지만 그 속엔 반드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지점도 있습니다. 바로 무엇인가 판단하기 전에 그 대상을 온몸으로 한 번 느껴보는 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죠. 누군가는 그걸 선입견이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선입견은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조금씩 바로 잡아가도 충분합니다.

오히려 어느 한 쪽으로 확 기운 다음에 '내가 왜 이 방향으로 끌렸을까?'를 복기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해 보는 게 훨씬 도움이 될지도 모르죠. 그러니 분석과 판단과 결론과 의미부여는 시간차를 두고 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게 또 한 번 증명(?) 되는 셈입니다.


07 . 저 역시도 참 의미 부여를 좋아합니다. 글의 초반에서도 설명드렸듯이 한때는 얼른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서 안달 난 적도 많았으니까요.

그러나 기획 일을 하는 순간에는 이 이성과 감성의 밸런스가 필수 조건처럼 몸에 붙어있어야 한다는 걸 정말 깊이 깨닫습니다. 어떤 때는 치열하게 물고 늘어져서 '대체 이걸 왜 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이것은 무슨 의미가 있고 사용자들에게는 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파악해야 하지만 또 어느 때는 '와. 이건 정말 뭐라고 콕 집어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좋다(혹은 싫다)'라고 본능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사실 이 순간은 꽤 당황스럽기도 한 게 사실이죠.


08 . 하지만 우선은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다음 시기적절한 때가 오면 그때 한번 이유를 찾아보기 시작합니다. 그럼 감정을 느꼈던 때의 그 기분과 그럴 수밖에 없었던 요인들이 함께 헤아려지면서 저만의 결과에 조금씩 수렴하게 되죠. 저는 그게 이른바 '기획자로서의 감을 잡아가는 과정'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09 . 몇 개월 전 ⟪엘리멘탈⟫이라는 애니메이션이 꽤 흥행했던 시기가 있었죠. 저도 뒤늦게 영화관에 달려가 집중해서 봤지만 너무 기대가 컸던 건지 한켠으로는 조금 아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러다 저와 영화 감성이 좀 비슷한 친구에게 '너는 어땠냐'라고 물으니 잠시 고민하더니 이렇게 답하더군요.

"일단 지금은 좋아. 나중에 또 감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10 . 저는 이런 태도가 가장 현명한 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꼭 뭔가 결론에 도달한 채 대답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내려놓고, '몰라 뭐. 잘 기억이 안 나네'라는 유체이탈 화법에 기대지도 않은 채 지금의 감정에 집중해 설명하는 태도 말이죠.

시간이 지난 다음 우리가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모르지만 우선 내 입안에서 느껴지는 그 맛에 집중해 본 다음 그걸 충분히 음미하는 데 시간과 정성을 쏟아도 늦지 않으니까요. 때로는 멋들어진 평론가 코스프레보다 날 것 그대로의 인간으로 살아가는 재미를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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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17일 오후 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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