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관승의 리더의 소통] 행복한 일은 매일 있다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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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 여행은 아무리 열심히 준비하더라도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 당황하게 만든다. 특히 제주도는 대부분 날씨가 변수가 된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풍경 때문에 기업의 워크숍, 학회 장소로 애용되지만, 기상 악화로 가끔 낭패를 본다.
필자의 지난 주 제주도 출장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아침 식사도 거른 채 김포공항에 일찌감치 달려왔는데 전광판에는 항공기가 두 시간 지연 출발한다는 일방적 고지가 적혀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제주도에 착륙했는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기내 통로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중년 남성과 젊은 직장인 사이에 옥신각신 언쟁이 붙더니 급기야 육두문자가 난무한다. “너, 몇 살이야?” “나이 먹었으면 똑바로 해!”
딱 한 줄뿐인 통로를 막은 채 두 사람의 시비는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부득불 내가 끼어들어 길 좀 비켜달라고 애원했다. 강의 시간에 지각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간신히 아수라장을 빠져나오는 동안에도 뒤에서 계속 고성이 들렸다. 고작 10초 먼저 나가려다가 볼썽사나운 광경으로 확대된 것이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사소한 일에 발끈하고 만인의 만인을 향한 분노가 터지는 걸까?
에미상 8관왕의 넷플릭스 시리즈 <비프-성난 사람들>의 핵심 주제도 분노였다. 미국의 한국계 제작진과 배우들이 만든 이 작품에서 비프(Beef)라는 영어 단어는 소고기가 아닌 누군가를 향한 악감정을 뜻한다. 주차장에서 경적을 울리며 시작된 사소한 시비가 분노와 복수로 치닫는다. 마치 폭탄을 던지듯 누군가를 향해 격렬하게 화를 내고 분노의 감정에 쉽게 빠져든다.
서양 인문학의 뿌리인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서도 핵심 주제는 분노였다. 트로이 전쟁에 나선 아킬레우스는 무서움을 모르고 돌진하는 용장이지만 아끼던 여종 브리세이스를 빼앗긴 뒤 분노하며 더 이상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폭탄 선언한다. 인간이란 원래 분노의 감정에 쉽게 굴복하는 동물일까?
아무튼 항공기 지연과 승객들 간의 실랑이 때문에 필자는 서귀포 강연장까지 비싼 돈을 내고 장거리 택시를 탈 수밖에 없었다. 담당자와 통화를 끝내고 불안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데 나이 지긋한 택시 기사가 한마디 던진다. “무대에 서는 분인가 봅니다. 행사는 몇 시에 시작되나요?”
연단 대신 무대라고 말하는 그의 한마디에 짜증이 확 풀렸다. 알고 보니 그는 최근 2~3년 사이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고 건강검진에서 암이 발견돼 수술까지 했다고 한다. 불행이 연달아 닥쳤지만 다행히 몸이 회복돼 일상의 감각을 유지할 겸 쉬엄쉬엄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 기사는 자신의 불행을 마치 남 이야기처럼 술술 풀어나가는 셀프디스의 달인이었다. 덕분에 필자도 최근 겪고 있는 어려움들을 털어놓았다. 요즘 왜 이렇게 일이 안 풀리는 걸까, 신세와 운명을 탓하기도 했다.
“어휴, 참 힘드시겠네요. 속상해하고 화내봐야 결국은 자기 손해더라고요. 늦지 않게 도착하게 해드릴 테니 안 좋은 일은 잠시 잊으시고 멋진 무대 만들기 바랍니다.”
기적처럼 강의 시작 10분 전에 도착했다. 한 손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한쪽 눈으로는 윙크를 보내며 그는 표표히 떠나갔다. 베테랑다운 삶의 여유 덕분에 그는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유머를 잃으면 모든 걸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
마음을 졸이고 있던 담당자의 안내를 받아 연단에 섰다. 미리 준비한 파워포인트 자료가 있었지만 그날 겪은 이야기로 시작한 덕분인지 청중의 몰입도와 반응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애니메이션 <곰돌이 푸>의 대사가 떠올랐다. “매일 행복할 순 없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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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13일 오전 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