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봉준호가 무섭더라 1. '기생충'을 보고 | 커리어리

나는 봉준호가 무섭더라 1. '기생충'을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봉준호 감독의 또 다른 영화 '괴물'이었습니다. 2. 유치한 생각이지만, 기생충이 살려면 '숙주'가 필요하고, '괴물'의 영어 제목이 The host, 숙주였으니까요.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 오래전 기억이지만, 영화 '괴물'을 보고 나서 '봉준호'라는 사람은 참 도발적이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학창 시절 한강에서 본 '괴물'을 영화화했다고 말했는데요. 4. 솔직히 말하면, 봉준호 감독의 그 말은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았습니다. 뇌피셜이지만 짧은 제 생각엔, 학창시절 바퀴벌레를 잡는 걸 즐겼던 사람이 정말 실제로 괴물을 봤다면, 10여 년을 기다려 그걸 영화로 만들기보다는, 당장에 그 괴물을 잡으러 가거나, 그 괴물의 사진이라도 찍으러 다녔을 것 같거든요. 5. 그래서 어렴풋하지만 괴물을 보고 나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어린 봉준호의 눈에, '사람이 또는 세상이 괴물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었구나'라고 말이죠. 6. 그런 생각을 하니, 한강에서 괴물이 나온다는 영화의 설정이 굉장히 '도발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7. 흔히 한국 사회의 산업적 성장을 '한강의 기적'이란 말로 표현하는데, 봉준호의 영화에선 그 기적의 공간에서 '괴물'이 나오거든요. 8. 그리고 이 도발적인 영화가 흥행에도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신기했습니다. 동시에 봉준호 감독이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지도 궁금했고요. 9. 그런데 '기생충'은 괴물보다 훨씬 더 도발적인 영화였습니다. 심지어는 영화를 보고 나서 '봉준호'라는 사람이 무섭다는 생각마저 들었고요. 10. '기생충'은 하층민,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을 '기생충적인 존재'로 직설적으로 묘사하는 영화입니다. 흔히 말하는 '약자도 충분히 악할 수 있다'는 문장을 영화화한 것이죠. 11. 그리고 영화에선 유머로 교묘하게 포장하지만, 범죄나 불법을 저지르는 것도 대부분 약자입니다. 약간의 죄를 짓더라도, 기생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죠. 12. 또한, 영화의 주인공들은 그런 행동을 하면서도 일말의 죄책감 같은 건 느끼지 않습니다. 살아남는 게 먼저니까요. 13. 뭐 여기까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진짜 섬뜩했던 부분은, 봉준호가 진짜 무서운 사람이라고 느꼈던 부분은, 영화의 핵심 변곡점에 '약자와 약자의 갈등'을 배치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갈등은 평화로운 기생 생활을 파탄으로 이끌죠. 14. 기생충은 영화 포스터와 홍보 문구에서 '행복은 나누면 커진다'며 '공존'의 메시지를 던지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애초부터 숙주와 기생충의 관계는 나름은 행복한 공생의 관계일 수 있습니다. 어찌됐건 잠시라도 둘은 동시에 실존할 수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기생충의 적은 숙주가 아닙니다. 15. 잔인하지만, 기생충의 진짜 적은 또 다른 기생충이며, 기생충과 기생충이야말로 서로 공존할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는 것이죠. 그래서 영화의 메인 갈등에 기생하는 두 가족을 배치한 걸 보고 정말 섬뜩했습니다. 16. 그..그..그런데 말이죠. 저 개인적으로 더 섬뜩했던 부분은 '영화의 결말'이었습니다. '목표가 없는 삶은 실패도 없는 삶'이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살면서 처음 목표를 가진 주인공의 꿈이 '집주인'이었다는 부분 말입니다. 17. 그 장면을 보면서, 막연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꾸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인생의 목표가 없거나 기껏해야 인생의 목표가 '건물주'인, 현실의 사람들의 허구성을 영화가 잔인하게 비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18. 그래서 조금의 위로나 공감, 그리고 일말의 대안 없이 끝내버리는, 이 영화의 결론이 참 잔인하고 냉정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봉준호라는 감독이 앞으로도 비슷한 영화적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다음 작품은 더 무섭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19. 이미 봉준호는 한강은 기적이 아니라, 괴물을 만든 공간이고, 약자의 진짜 적은 약자라는 메시지를 영화에 담아낸 감독이니까요. 20. 이런 생각을 하니 봉준호라는 사람은 단순히 스릴러나 서스펜스를 잘 만드는 감독이 아니라, 봉준호 그 자체가 '스릴러적인 존재'라는 생각도 잠시 했습니다. 21. 그러다 언젠가 봉준호 감독이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저는 '영화'가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단지) 저는 영화를 통해 세상을 폭로하거나, 제가 보는 세상을 보여줄 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요. 22. 그런 의미에서, '괴물'이나 '기생충'에서 그가 보여준 세상은 어쩌면 그의 생각이 아니라, 관찰자로서 그가 바라본 한국 사회의 단면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봉준호는 그저 자신이 본 그 장면들을 영화적으로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을 뿐이죠. 23. 어쩌면 그에게는 처음부터 해답을 제시할 책임감이나, 위로나 공감을 해야 할 이유 따위는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저 냉정한 시선으로 관찰하고 표현하고 묘사하는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 말이죠. 그가 '살인의 추억'에서 살인마를 잡지 못한 그 당시 한국 사회의 무능을 그대로 영화화한 것처럼. 24. 그렇다면, 진짜 스릴러는 '봉준호'가 아니라, 한국 사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영화의 후반에 '여자 주인공이 지워지는 장면' 또한, 어쩌면 관찰자로서 그가 목격한 한국 사회의 스릴러적인 단면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25. 물론 봉준호의 방식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좀 더 개입해서 세상을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 게 맞다는 사람도 있을 것 같고, 그럴 수 없다면 적어도 희망이라도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모든 건 각자의 선택일 뿐, 그 누구도 그 누구에게 강요할 순 없겠죠. 26. 다만, 괴물과 기생충을 비교했을 때, 저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은 봉준호의 영화에서 미묘하게 달라진 '언론의 이미지'였습니다. 27. '괴물'에서 언론은 앵무새처럼 권력자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선전의 도구처럼 묘사되었지만, 그래도 이번 영화에선 조금이라도 뭔가를 파헤치는 존재, 적어도 실체적 진실을 궁금해하는 존재 정도로는 비춰졌습니다. 조금의 뉘앙스가 달라진 지점이었고, 어쩌면 태플릿 PC 보도를 한 JTBC에 대한 봉준호식의 리스펙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8. 그리고 많은 욕을 먹고, 사람들을 빈번하게 실망시키지만, 그래도 언론은, 아니, 적어도 몇몇 기자들은 '본인의 콘텐츠로 사회를 좀 더 나은 곳으로 바뀔 수 있다'고 믿는,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봉준호와는 완전히 다르게 콘텐츠를 바라보는 사람들이기도 하죠. 29. 어쩌면 그런 사람들이 봉준호의 눈에는 다소 신기하게 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권력이 무너지기도 했고요. 30. 그래서 마지막으로, 언젠가 봉준호가 한국의 언론을 정면으로 다루는 영화를 만들면 굉장히 흥미롭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런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온다면 굉징히 재미있을 것 같네요. 끝.

나는 봉준호가 무섭더라

Stibee

2020년 2월 29일 오전 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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