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다른 사람의 안경을 쓰고, 그의 세상을 훔쳐보기

장기하와 얼굴들은 좋아하는 밴드입니다. 멋지게 해체해서 이제는 과거형의 밴드가 되었습니다. 몇몇 곡들은 정말 좋아해서 아직도 종종 듣습니다. 밴드와 노래의 호감은 프런트맨 장기하의 영향이 가장 큽니다. 좋아하는 곡들의 공통점을 생각해 보니 ‘가사’였습니다. ‘싸구려 커피’는 참 혜성처럼 등장했습니다. 처음 듣는 흐물흐물한 랩과 가사와 비주얼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가사의 부분부분에서 기억나는 감정들이 공감되기도 했습니다. 그 가사는 장기하의 경험이 아니었고 그저 군대에서 만든 곡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땐 배신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 저의 음악 취향 기준의 팔 할은 가사입니다. 음악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하는 수단이라 생각하는 편입니다. 하는 이야기에 공감하며, 표현 방식에 감탄하는 것이 음악을 듣는 즐거움입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막상 쉽지는 않습니다. 해봐야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을 읽는 건 쉽습니다. 누구나 한 마디씩 할 수 있으니 비평도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창작이라는 일은 형식과 대상을 떠나서 어려운 일입니다. ​ 이 책은 장기하의 산문집입니다. 10여 년의 밴드를 그만두고 낸 책입니다. 책의 처음에 그는 책을 잘 읽지 못하는 사람이라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은 좋습니다. 반칙 같습니다. 보통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많은 인풋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인풋이 많고, 또 좋아야 좋은 글을 쓸 재료가 될 테니까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아님에도 그의 글은 쉽고 깊이도 있고 독특합니다.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공부를 했지만, 대학에서는 철학과 음악밖에 없었다는 말이 힌트가 됩니다. ​ 에세이를 읽는 건 다른 사람의 안경을 잠시 써보는 것 같습니다. 책쓴이의 시선과 생각을 간접적으로 훔쳐볼 수 있는 매력이 있습니다. 그 대상이 나와는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더 호기심이 듭니다. 그의 노래를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그의 관점과 생각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음악 못지않게 생각도 관점도 재밌고 매력적이었어요. ​ ​ —— 나는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산다. 그런데 이것은 달리 말하면 하고 싶은 것이 없을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생각한다. 물론 공연이라든지 녹음이라든지 정해진 일정이 있을 때는 그럴 필요가 없지만, 그 일정들도 따지고 보면 매일 고민한 결과로 생긴 것들이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나는 잠에서 깨는 순간 출근을 하는 셈이다. 정신이 들자마자 ‘너는 무엇을 하고 싶냐’고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음에 나 자신은 그리 자주 대답해 주지 않는다. 대답을 듣더라도 불명확하고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뾰족한 수없이 하루를 지나 보내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너무 실망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크게 좌절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그리고 하루의 어느 순간에는 스스로 퇴근해야 한다. 그런데 이 퇴근이라는 것도 간단하지 않다. 정해진 장소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뇌만을 이용해 내 뇌를 퇴근시켜야 한다. 그것은 대체 어떻게 하는 거냐고? 나 역시 아직 연구하는 중이다. ​ —— 그 몇 달의 시간이 지난 뒤, 싸구려 커피를 부르며 그런 경험을 다시는 하지 못했다. 물론 그것에 대해 불평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기에는 싸구려 커피가 유명해져서 내가 얻은 것이 너무 많다. 조금 과장하자면 그 덕에 지난 십 년을 먹고산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맨 처음의 그 세 달 이후 싸구려 커피가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만은 분명하다. 그걸 다시는 되찾을 수 없다는 것도 말이다.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가치도 세상에는 있는 것이다. ​ —— 한편으로는 유명한 사람일수록 잊힐까 봐 두려운 법이다. 그게 수많은 연예인들이 유튜브 콘텐츠를 만들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새로운 경향에 동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압박감도 다들 클 테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뭐라도 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재미있는 게 있다면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내 일상의 일부를 콘텐츠로 만들고 싶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상이 콘텐츠가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일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 —— 내 자리를 위협받고 있다는 데서 오는 섬뜩함, 그다음에 찾아오는 것은 무력감이다. 나에게 있어서 창작이란 자유와 같은 의미다. 세상을 살면서 온전히 내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부분, 그것이 바로 창작의 영역인 것이다. 그 작디작은 영역마저 온전히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가만,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창작이라는 것이 정말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인가? 세상의 모든 음악은 결국 이전에 나왔던 음악들의 리믹스에 불과하다는 말도 있다. 얼핏 극단적인 것처럼 들리는 이 이야기는 곱씹을수록 생각보다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 —— 혼자 여행할 때는 밤을 조심해야 한다. 신변에 위협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마음을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왠지는 모르지만 혼자 머무는 여행지에 밤이 찾아오면 쓸쓸한 마음이 되는 일이 많다. ​ —— 윤회를 얼마간 납득하는 이유는, 누구나 아는 상식에 비추어볼 때 어느 정도 말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힌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아무도 정성스레 묻어주지 않는 경우라 할지라도 땅으로 돌아가는 것은 마찬가지다. 땅에서는 새 생명이 자라난다. 새 생명은 다른 생명의 먹기가 되기도 한다. 생명의 일부인 물은 하늘로 날아가 구름이 되기도 하고 비가 되기도 하고 강물이 되었다가 바다가 되기도 하고 다른 생명의 터전이 되기도 하고… 더 이상 장황하게 이어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책에도 흔히 나올 법한 이야기고,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윤회다. ​ —— 그러고 보면, 삶은 예술을 똑 닮았다. 그림이나 소설이나 노래가 하나쯤 사라진다고 해서 세상이 크게 바뀌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물론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받는 명작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작품들마저도, 어떤 이들에게는 옆집 꼬마의 미술 숙제와도 별반 다를 것 없이 여겨지기 마련이다. ​ ——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 나는 나이나 세대는 결국 문화권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십 대와 사십 대는 마치 아프리카와 아시아처럼 다른 문화권인 것이다. 다른 문화권에 이사를 왔고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그럭저럭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 스타트업 책 리뷰 (51) ] 잠시 다른 사람의 안경을 쓰고, 그의 세상을 훔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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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10일 오전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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