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그럽고 친절한 사람으로 살고 싶지만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괜히 착취당하고 인생이 피곤해지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적으로 만난 전문적인 관계에서는 부탁을 쉽게 들어주거나 양보하거나 또는 지나치게 성실한 모습을 보였을 때 되려 더 많은 부탁과 참을성과 더 많은 업무가 밀려오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듀크대의 연구자 매튜 스탠리와 동료들은 직장 상사들을 대상으로 특정 팀원이 얼마나 부탁을 잘 들어주고 너그러운 편인지를 먼저 묻고, 또 해당 팀원에게 착취적인 과한 요구를 하겠는지도 물었다. 과한 요구의 예로는 ‘보상 없이 야근 하기’, ‘보상 없이 휴일 반납하고 출근하기’, ‘점심시간 반납하고 일하기’ 등이 있었다. 그 결과 상사들은 너그러운 직원에게 너그럽지 않은 직원들에 비해 더 많은 부탁을 하겠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너그러운 직원에게 보상해주고 우대하기는 커녕, 더 많은 부담과 업무를 주고 결과적으로 더 적은 보상과 많은 착취를 하겠다고 한 것이다. 상사들은 거절을 잘하고 다소 이기적인 직원들보다 이타적이고 너그러운 편인 직원들이 어려운 부탁을 더 ‘자발적으로 기꺼이’ 할 거라 믿는 모습을 보였다. 너그러운 직원들은 심한 부탁을 해도 크게 싫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큰 부담 없이 부릴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이었다. 반면 실제 팀원이 아닌, 이타적이고 너그러운 직원이라는 평가를 받는 가상의 인물에 대한 시나리오를 주고 이 사람에게 과도한 요구를 하는 것이 얼마나 도덕적인지 평가하게 했을 때는 옳지 못하다고 평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워하는 특성을 이용하여 이타적인 사람을 착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인식을, 상사들이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즉, 잘못된 행동임을 알고는 있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이 팀원에게 하는 바로 그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생각은 잘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만 너그러운 사람을 착취하는 것이 옳지 못한 것임을 상기시킬 때에는 무리한 요구를 하려는 의향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직원들이 왜 자꾸 회사를 나가는지, 사람들이 왜 우리 회사에는 일하러 오지 않는지에 대한 고민을 듣곤 한다. 또 어떤 회사는 절대로 가지 말라는 이야기 또한 자주 들을 수 있다. 이런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그 기저에는 희생만 요구하고 제대로 된 보상은 하지 않는 환경, 마음을 다해 열심히 할 수록 손해를 보고 혼자 바보가 되는 환경, 결국 공정성과 상호성에 대한 신뢰가 없다는 문제가 존재한다. ‘열심히 해도 돌아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현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간 우리 사회가 이타적이고 친절한 사람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돈을 받았으니 당연히 과도한 요구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등 사회적 족쇄를 통해 착취를 정당화해온 것은 아닐까? 결국 아무 것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학습한 사회에서 착취의 세습을 거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한국 미디어에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동경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내가 갑질을 당하기는 싫지만 갑질을 하고는 싶고, 내가 착취당하기는 싫지만 나는 착취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메시지들이 읽혀서 당황스러울 때도 많다. 사회를 지배하는 공식을 깨는 것은 어려우니까, 착취당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자고 하기보다는 나만이라도 위로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걸까? 그 결과는 보다시피 모두가 모두에 의해 밟히는 사회다. 다행인 것은, 위의 연구에서도 나타났듯 때로는 도덕적인 문제를 잠깐 ‘상기’하고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조금 더 나은 행동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라도 이런 정신적인 신분제와 높은 지위에 대한 선망/동경에서 최대한 멀어져보겠다고 다짐해본다.

[박진영의 사회심리학] '아랫사람' 착취가 당연한 사회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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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의 사회심리학] '아랫사람' 착취가 당연한 사회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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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18일 오전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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