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는 정해진 목표를 향해 뛰는 경주가 아니다. 길을 알려주는 정답 지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찾아야 하는 보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직업은 생활에 필요한 재원을 만드는 일이고, 커리어는 나에게 맞는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그 인생 과정에서 성장을 하게 된다.
나에게 맞는 커리어를 찾는 과정에는 자연스럽게 시행착오가 따른다.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듣거나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고 배울 수도 있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경험해 보고 터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중요한 것은 경험의 겉모습이 아닌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다.
각 경험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몇 가지 항목들이다.
1. 대기업 vs. 스타트업
대기업의 가장 큰 장점은 갖춰진 시스템과 그로 인한 안정감이 아닐까 싶다. 갖춰진 시스템 속에서 세분화된 자신의 전문분야 일을 하게 된다. 시스템 안에서는 전문가로 인정받지만 시스템을 벗어나면 홀로서기가 어려운 단점이 있다. 마켓 사이즈나 임팩트가 큰 프로젝트에 기여하는 장점이 있는 반면, 자신이 그저 ‘직원 1’인 것처럼 느끼기 쉽다. 리스크 관리 시스템이 안정적이라는 장점도 있지만, 이건 누구든 언제라도 교체 가능한 시스템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대기업은 특성상 잉여인력이 생기기 마련이라서 부서별로 중복된 일을 하거나, 알력 다툼을 하거나, 비효율이 많아지기도 한다. (이건 기업이 비효율을 감당할만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대체적으로 의사결정 라인이 복잡하고 조율해야 하는 팀들이 많기 때문에 일이 느리게 진행되는 경향이 있다.
스타트업의 가장 큰 장점은 속도와 도전정신 그리고 다각형 역량을 가지게 된다는 게 아닐까 싶다. 스타트업은 애자일이 생명이다. 빨리 결정하고 빨리 실패하고 빨리 피봇할 수 있어야 살아남기 때문에 기업 체질이 민첩하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실패하고 망하는 위험도도 상대적으로 높다. 스타트업은 비전 공유 공동체라는 전제가 필요한데 그래서 본인의 열정과 기업 비전의 합이 매우 중요하다. 만약 비전보다는 ‘돈을 버는 직장‘이 중요하다면 스타트업의 미생 드라마를 버티기 힘들 것이다. (대기업은 적어도 기업 네이밍과 안정적인 월급이 직장 내 온갖 드라마를 버티는 힘이 되어준다) 직무가 세분화되어 있지 않아서 일당백으로 여러 가지 일을 같이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장점은 잘하면 천하무적이 된다는 것이고 잘못하면 물경력만 남는다는 것이다.
2. IC(Individual Contributor) vs 매니저
IC는 실무자를 말한다. 미국 특히 테크기업에서는 실무 전문 마스터로 커리어를 키울 수 있는 트랙을 지원하는 기업들이 제법 있다. 혹은 굳이 매니저가 되지 않고 은퇴할 때까지 실무자로 남겠다는 목표를 가진 사람들도 있다. 한국 기업에는 실무자 트랙이 없는 것이 아쉬운 부분이긴 하다. 보통 실무자로 성과를 인정받으면 매니저로 승진을 하는 게 흔한 커리어 패스 형태인데, 실무를 잘하는 것과 관리자의 역할을 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역량이라는 걸 종종 놓치는 게 아닌가 싶다.
실무자의 핵심은 생산자(Creator)이다. 최인아 님은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에서 음악 감상(소비)을 좋아하는 사람과 음악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것처럼, 본인은 조직을 관리하는 일보다는 크리에이터로서 무엇인가를 기획하고 생산하는 것에 훨씬 열정과 보람을 느낀다고 소개를 한다.
반면, 매니저는 조력자(Enabler)이다. 팀을 성장시키고, 프로젝트에 맞게 최적의 팀을 구성하고, 사람을 코칭하고, 성과관리를 한다. 사람을 육성한다는 측면에서 부모, 교육자, 종교인과 비슷한 직업적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나 싶다. 만약 매니저가 권한을 멋대로 휘두른다면, 그건 사실 매니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그게 가능한 회사 시스템의 문제라고 봐야 한다.
3. 양산 과제(Production) vs. 선행 연구(R&D)
회사의 규모와 성격에 따라 연구가 중심인 곳, 양산이 중심인 곳, 혹은 둘 다 하는 곳이 있다. 선행연구는 주로 가설을 세우고, 리서치를 하고, 여러 콘셉트를 개발한다. 아이디어가 바로 돈과 연결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고 그래서 성공이나 실패에 대한 압박도 덜한 편이다. 반면 회사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때 제일 먼저 타격을 받는 팀이 주로 선행 연구 팀이다. 그리고 중간에 부러지는 일들도 많다.
프러덕팀은 마켓에 출시되는 제품을 만드는 일을 한다. 내가 만든 제품을 실제 소비자가 사용하게 되는 데서 느끼는 희열과 보람이 구체적이다. 단점은 상용화 과정에서 많은 아이디어가 탈락하거나 변형되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좌절감, 혹은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출시된 제품을 보며 느끼는 자괴감이 따르기도 한다. 대부분 실적과 직결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실적에 대한 압박이 크다.
4. 제로 투 원(0 to 1) vs. 확장 (1 to many)
제로 투 원은 새로운 제품(혹은 서비스)을 개발하거나, 새로운 마켓을 뚫거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일 등을 말한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에는 상당한 에너지가 들어간다. 불확실성이 주는 스트레스, 실패 가능성의 위험요소, 우왕좌왕, 그 과정에서 오는 번아웃, 그리고 날카로운 신경전이 난무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 냈을 때의 그 짜릿한 성취감은 마약처럼 중독성이 강하지 않나 싶다.
1이 만들어지고 나면 1x10, 1x100, 1x1000 이렇게 판을 확장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때는 제로 투 원을 만들 때 필요했던 역량과는 다른, 이를테면, 확장성, 효율성, 생산성 이런 부분이 중요해진다. 기껏 1로 싹을 터트리고 뒷심이 부족하면 싹이 더 이상 크질 못하고 사장되기도 한다. 사람에 따라 제로 투 원을 만드는 일을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판을 키우고 비즈니스를 성장시키는 일을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이 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특성들이 있다. B2B vs. B2C, 하드웨어 vs. 소프트웨어, 전문가 vs. 제너럴리스트, 월급을 주는 사람 vs. 월급을 받는 사람, 자신을 드러내는 일 vs.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일, 명확한 일 vs. 모호한 일, 분석적인 일 vs. 주관적인 일, 등등.
여기서 중요한 건, 각각의 경험 특성에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내가 타고난 기질과 해당 업무가 어울리는 성질인지, 어려운 부분을 참을만한지, 재미있는 부분이 있는지, 잘하고 싶은 욕심이 나는지, 오래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지, 등등 자신의 반응을 알아챌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반응은 수면의 질이나 근육 긴장과 같은 신체반응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자신감이나 우울감처럼 심리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신의 반응을 수시로 기록하고 추이를 살펴보고 자신에게 맞는 일은 어떤 일인지 인지를 하게 되면 다음 징검다리 돌을 놓을 때 훨씬 방향성을 잡기가 쉽다.
모든 사람은 매일매일 다른 경험을 한다. 경험을 흘려보내는 사람과, 자각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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