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정원과 신뢰 사회의 상관관계] 최근 한국 내 의대 정원 수 증원을 둘러싼 기사들을 읽다 보니... 얼마 전 핀란드가 속사포로 대학 입시 정원을 늘린 사실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공공교육'과 '신뢰사회'가 발 빠른 사회 변화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생각하게 되는군요. 1. 올 초, 핀란드 정부는 코로나 19 사태로 인한 청년 실업률 증가를 우려해 대학 입학 정원 수를 늘리는 방안을 냈습니다. 올해 한시적인 조치라지만 당시 핀란드 고용부 쪽이 요청한 정원 수 증가율은 무려 10% 였죠. 작년보다 대학 입학생을 10% 더 받으라는 소리입니다. 2. 왜 이런 정책이 나오게 되었는가: 핀란드는 대학생들에게 기본생활금 지원을 합니다. (그리고 대학 등록금은 무료입니다.) 코로나 19로 젊은이들의 인턴, 알바, 신규 일자리가 줄어드는 상황이 도래하자 핀란드 정부는 청년층 빈곤화를 염려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청년들이 무력하게 실업상태로 있는 것보단 기본생활금 받으며 미래를 도모하는 것이 국가 이익에 더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하기에 이르렀죠. 그래서 대학 입학 정원을 늘리기로 한 겁니다. 3. 핀란드 정부는 이러한 증원 방안을 대학입시철을 앞둔 5월 초에 발표했습니다. (핀란드는 5-6월이 입시철입니다) 정부의 방침이 나오자마자 대학계는 10% 증원은 아무래도 무리라는 반응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시대에 위기를 서로 분담해야 한다는 부분에 동의한다"라고 밝히며 큰 그림에서의 정부의 제안을 수용합니다. 그리고 정부와 세부사항을 협상하기 시작했죠. (핀란드의 모든 대학은 국공립으로, 핀란드 교육부 관할 아래의 국가 기관입니다. 즉, 핀란드 정부가 본연의 권한을 이용해 입학 정원 수를 늘리라고 하면 대학은 이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구조입니다.) 4. 논의가 언론에 보도된 지 바로 몇 주 안되어, 5월 중순... 제가 근무하는 알토대학교에서도 각 단과대학별로 몇 명의 신입생을 더 받을지 실무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학과별 교수진, 강사, 대학 직원 노조 등이 모여 '어느 과에 몇 명을 늘릴까'를 두고 실무 논의를 하더군요. 그리고 이렇게 결정된 사안은 곧바로 2020년 가을학기 입학생부터 적용이 되었습니다. 정부 발표가 나온지 한달 여 만에 일사천리로 일이 해결된 셈이죠. 5. 당연히 핀란드 대학들은 대학입시 정원 증가가 수업의 질 하락으로 이어질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코로나 19 때문에 재택근무/온라인 수업으로 대학 강의가 대체된 마당에 더 많은 학생을 받으라니... 대학의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핀란드의 대학은 모두 국공립이며 무료 등록금입니다. 학생을 더 많이 받는다고 해서 수익이 더 올라가는 구조도 아니죠. 심지어 핀란드의 대학 별 실적평가는 '학사/석사/박사 졸업생 수'를 기준으로 판가름됩니다. 신입생을 많이 받는다고 자동으로 정부가 예산을 더 주는게 아니라, 그 학생들을 성공적으로 졸업시켜야만 이듬해 예산이 올라가는 구조죠. (즉, 신입생을 올해 10% 많이 받아봐야 4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후에나 그 것이 교육예산에 반영됩니다. 반대로 수업의 질이 떨어져 학생들이 이탈하면 예산이 오히려 줄어들겠죠...) 6. 그럼에도 불구, 핀란드의 대학들은 정부의 '대학 입학 정원 증원을 통한 청년지원'이라는 큰 그림에 공감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원한다면 언제든지 정부-대학이 만나 논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신뢰하고 있기에, 일사천리로 큰 그림에 동의한 후 세부적인 사항을 이후 협상 테이블에 올리는 식의 '우선순위 설정'이 가능했습니다. 아마 내년 교육예산안 협상에 대학들의 목소리가 좀 더 반영되겠죠. 평소 실적평가/교육예산 편성과는 별개로 특별 재난 지원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정부도 통 크게 10% 증원을 받아들여준 대학 측 입장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7. 그래서... 요즘 한국의 정부-의사단체-국민들 간의 갈등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듭니다. 정부와 의사단체가 서로 신뢰를 못하니 매번 '우리랑 말도 안 하고 제멋대로 한다' vs '말하려고 해도 너네가 강경하게 나오잖아'라는 공방만 이어집니다. 그리고 결국엔 '누가 더 오래 버티나 보자' 식으로 강대강 구조만 남습니다. 만약에 대한민국의 교육이 국공립 중심이었다면, 정부와 교육계 의료계가 서로 협의할 수 있다는 신뢰가 쌓여있었다면... 이런 상황에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맞이하려면 대한민국의 교육과 신뢰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경직된 사회구조로는 이 엄청난 사회적 변화를 받아들일 수가 없을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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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24일 오전 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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