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가 이사도라 덩컨은 춤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춤의 의미를 말로 설명할 수 있다면 굳이 춤을 출 이유가 없겠지요. (If I could tell you what it meant, there would be no point in dancing it.)”
우리 인생도 그렇다. 삶의 의미를 말로 설명할 수 있다면 굳이 삶이라는 춤을 출 이유가 없을 것이다. 춤이란 몸으로 느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춤의 의미를 말로 음미할 수 있다면 그저 가부좌 틀고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춤의 본질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춤이란 그런 게 아니다. 승무처럼 느린 춤사위라고 해도 우주의 변화를 품고 있는 듯하다. 그 변화의 본질을 어찌 말 몇 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까. 오로지 몸으로 그 변화를 품어야 한다.
삶도 그러하다. 사람의 가치관과 생각은 변한다. 내 주변 환경과 맥락도 시시각각 변한다. 그러나 말은 뱉는 순간에 굳어진다. 고정된 맥락 속에 갇힌다. 그러니 말로는 삶의 의미를 표현할 수 없다. 삶의 의미는 몸으로 부딪히며 그 삶을 살아야 느낄 수 있다.
춤꾼의 얼굴에서 희열과 기쁨을 본 적이 있다. 옅지만 깊은 미소를 본 기억도 난다. 춤에 푹 빠진 사람은 춤의 의미를 고민하지 않을 것 같다. 춤을 추는 순간에 온몸으로 느껴지는 희열과 충만감 속에 그 고민은 용해되어 사라질 것이다
삶 또한 그러하다. 삶이라는 춤에 푹 빠져 그 삶을 즐기고 있다고 해 보자. 우리는 굳이 삶의 의미를 물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순간은 대체로 그 삶이 재미없고 힘들 때다. 의미라도 있어야 그런 삶을 살아낼 수 있을 테니까.
니체는 ‘삶을 즐기려면 아이처럼 살라’고 말했다. 아이는 어른과 달리 끊임없이 놀이를 찾고 놀이에 빠져든다. 우리가 삶을 재미있는 놀이처럼 살면 ‘지금 이 삶을 왜 살아야지?’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해소될 거라고 한다. 그러나 어른들은 아이처럼 사는 게 너무 어렵다. 왜일까?
지난 주말 아이와 충남의 한 휴양림을 산책하면서 한 가지 이유는 찾은 듯했다. 아이는 산책길에 자꾸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자기 모습을 찍자는 게 아니었다. 이슬 맺힌 거미줄, 작은 씨앗 등등 자신이 발견한 것들이 너무 신기하다며 사진으로 남기자고 했다. 평범해 보이는 풀꽃까지도 아이는 신기해하며 즐거워했다.
그 순간, 아이와 어른의 중요한 차이를 깨달았다. 어른은 호기심이 없었다. 내 눈엔 그저 나무와 풀만 보였다. 작은 꽃과 씨앗, 거미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는 어른이 무심코 지나친 많은 것들을 본다. 그리고 신기해한다. 기뻐한다. 어른에게는 평범한 순간이 아이에게는 즐거운 순간이 되는 것이다.
차이는 호기심이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상을 보면 일상의 많은 것들이 즐거운 놀이가 된다. 그러나 어른은 호기심을 잃는다. 새롭고 신기해하며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이런 마음으로는 뭘 해도 즐겁지 않다. 지루하고 따분할 뿐이다. 놀이가 되지 못한다. 억지로 하는 ‘일’이 된다. 그것도 하루에 최소 8시간은 투입하는 힘든 ‘노동’이 된다. 하지만 그 노동은 피할 수 없다. 해야만 한다. 그때부터 우리는 그 노동, 그 일의 의미를 찾게 된다. 재미가 없다면 의미라도 있어야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다.
그런 날이 반복되면 우리는 ‘삶의 의미’까지 질문하게 된다. 일은 우리 삶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 답을 찾지 못한 채 니체의 비유대로 낙타의 삶을 살아간다. 무거운 짐을 진 채 터벅터벅 인생이라는 길을 걷는다.
그렇다면 왜 어른은 호기심을 잃게 되는 걸까? 그건 커가면서 세상 많은 것들을 구분하고 범주화하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어른은 숲에서 봤던 수많은 식물을 그저 ‘나무’와 ‘풀’로 구분해 범주화한다. 개별의 나무와 풀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뭔가 독특하고 신기한 것이 눈에 들어와도, 그건 그저 나무로 구분됐고, 풀로 범주화됐다. 개별 개체의 독특함과 신기함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는 다르다. 아이들은 아직 어른들의 구분법을 배우지 않았다. 덕분에 개체의 독특함과 신기함에 주목할 수 있다.
어른은 못 보는 평범한 꽃과 거미줄, 씨앗 등에 신기해하며 호기심을 보인다. 그 호기심을 바탕으로 어른과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구분하고 범주화한다. 그러니 아이들의 머리는 어른보다 훨씬 더 유연할 수밖에 없다. 일상을 재조합하고 재창조할 수 있다. 일상이 놀이가 된다. 아이는 그 놀이에 빠져든다.
그렇다면 어른인 우리가 아이의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아마도 ‘언러닝(unlearning)’이 그 답일 것 같다. 언러닝은 과거에 배운 것을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화가 피카소는 언러닝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그는 모든 예술가의 그림을 다 소화하려고 했다. 최선을 다해 자기보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위대한 화가들의 화법을 철저하게 익혔다.
하지만 피카소는 그토록 열심히 공부한 것을 의도적으로 잊었다. 치밀한 원근법과 사실적인 색채를 잊었다. 이는 대상을 독특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창조적으로 보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피카소는 완전히 자기만의 독특한 화풍을 창조했다.
우리도 세상을 구분하고 범주화하는 기존의 낡은 지식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지금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 그래야 아이의 호기심을 회복할 수 있다. 그래야 내 일상이 조금은 더 새롭고 신기해질 수 있다. 일상이 조금은 더 ‘놀이’ 같아질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한 친구에게 보냈던 편지가 기억난다. “나에게는 특별한 재능이 없네. 난 단지 호기심이 지독히 많을 뿐이야.” 아인슈타인이 또 다른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는 우리가 태어난 이 세상의 놀라운 수수께끼 앞에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서 있는 일을 멈춰서는 안 되네.“
인터넷에서 아인슈타인 사진을 찾아보니, 혀를 길게 내민 천진난만한 얼굴이 보인다. 왜 그가 아이 같은 얼굴로 사진에 등장하는지 비로소 그 이유를 알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