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짓는다는 것 : '네이밍'을 위한 현실적인 고민과 노력

01. 며칠 전 절친한 분의 의뢰로 네이밍 작업을 하나 하게 되었습니다. 브랜딩 일을 한다고 하면 자주 받는 의뢰 중의 하나인데, 가장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는 일이 바로 이름 짓기, 이 네이밍입니다. 02. 네이밍이 어려운 이유는 결과론적 시각이 가장 크게 작용하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아는 위대한 제품이나 서비스, 브랜드로 성장한 다음에야 '저 브랜드는 이름부터 근사해'라는 평을 듣게 되지만, 사실 그 이름을 처음 들이밀었을 때는 반신반의하거나 '이게 뭐냐'는 식의 반응을 보인 사람들이 훨씬 많을 거거든요. 하물며 큰 성공을 거둔 뒤에도 '솔직히 이름이 뭐 얼마나 대단한 역할을 했냐. 성공하고 나니까 좋아 보이는 거지'라는 내부의 비판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03. 동의가 되는 부분도 있고 아닌 부분도 있지만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네이밍의 역할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이름을 짓기 위해서는 (그 수많은 핍박과 의심과 결과론적 시각의 집중포화를 맞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노력과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지 현실적인 방법들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 같네요. 04. 네이밍에 정답이 없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계실 겁니다. 어쩔 땐 저도 수십 개에 해당하는 리스트를 만들어 가슴에 품고 다니면서도 맘에 드는 녀석이 하나 없어 끙끙 않을 때가 많거든요. 이번에 지인이 의뢰하신 네이밍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비업무의 영역이지만 또 그분에게는 나름의 중요한 의미가 있는 프로젝트이니 대충 할 수도 없는 노릇이죠. 때문에 요 며칠간은 매일 아침마다 몇 개의 단어를 입으로 발음해 보고 운전하고 지나가다 눈에 밟히는 간판 위에 그 단어를 얹어보기도 하고, 만나는 사람에게 '이런 유형의 발음이 어떻게 들리시나요?' 같은 질문들을 해대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05. 그런 노력들 속에서 이번에도 깨달은 것 한 가지는 네이밍이라는 분야야말로 지나치게 깊이 파고들어갈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우고, 버리고, 비우고를 반복하며 먼 시각에서 흐린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면, 네이밍을 일반적인 기획이나 브랜딩처럼 기존의 지식과 정보 위로 쌓고 또 쌓아가며 다듬는 방법을 택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06. 그래픽 디자이너로 시작해 90~2000년대 전 세계 기업의 로고를 수도 없이 많이 디자인 한 폴 랜드(Paul Rand)라는 인물을 아실 겁니다. 그런 폴 랜드가 남긴 유명한 어록이 하나 있죠. '좋은 이름을 만나면 로고 작업의 절반은 이미 끝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좋은 이름은 탄생과 동시에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그 자체로 브랜드가 되기 때문이다. 간결하지만 명확한 이름을 만나면 로고는 10초 만에도 그린다.' 07. 그래서 저는 네이밍을 할 때 나름의 원칙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물론 이 원칙은 자주 깨지기도 하지만요... 일단 저 스스로를 다독이는 무기인 셈이죠.) 첫째, 발음 자체가 되도록 간결하고 쉬울 것 둘째, 의미 파악을 위한 depth가 깊지 않을 것 셋째, 유행의 흐름을 되도록 덜 타게 할 것 넷째, 다른 이름과 헷갈리게 만들지 않을 것 다섯째, 후발주자라는 인식을 절대 심어주지 말 것 08. 이렇게 보면 사실 위 다섯 가지 원칙은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바로 '쉽고 간결하되 누군가를 의식해서 만든 것처럼 보이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이죠. 그리고 저는 이것이야말로 네이밍이자 브랜딩을 하는 가장 본질적인 노력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우리다움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되, 그것이 유일하고 특별하고 소중하게 하는 것'이 바로 브랜드를 만드는 첫 번째 이유가 될 테니 말이죠. 09. 그래서 혹시라도 업무를 하시는 중에 네이밍을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저 필 꽂히는 느낌대로 여러 단어를 조합해 볼 게 아니라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마치 그 브랜드가 그 이름으로 런칭했다고 가정하고 계속해서 가상현실에 접목해 보는 노력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면서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더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게 없을지 하나씩 체크하는 게 좋은 이름을 만드는 진정 어린 노력이 아닐까 싶거든요. 10. 네이밍 업무를 할 때면 수명이 몇 년씩은 단축되는 듯한 느낌이지만, 좋은 이름 하나를 만들고 나면 그 뿌듯함과 벅참은 다른 무엇보다도 오래 보존됩니다. 누군가는 이름을 짓는다는 그 무게감이 버거워 굳이 맡으려고 하지 않을 때도 많지만 개인적으로는 한 번쯤 과감히 도전해 봐도 좋은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존재에게 이름을 부여한다는 행위는 기존에 우리가 하던 일과는 또 전혀 다른 책임감과 사명감을 안겨다 주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이름을 짓는 일을 참 애정하고 더 잘하고 싶은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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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17일 오후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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